[ 5.18 특집 ] ③ 5.18 직전 시대 상황 2 – 전두환은 원래부터 스트롱 맨( strong man )이었을까?
- 활동 시한 마감, ‘5.18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 반응 정소앙 발행인 jsakor@naver.com |
2024년 07월 03일(수) 10:12 |
[ 박정희 정권 시절, 차치철 청와대 경호실장 밑에서 부하로 근무하던 굳은 표정의 전두환과 노태우. 출처 : MBC방송 캡처 ] |
■ 활동 시한 마감, ‘5.18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에 대한 반응
지난 6월 24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4년 6개월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최종 종합보고서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현재 5.18 조사위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다운받을 수 있고, 9월 이후에는 진술본, 종합보고서 영어 번역본 등과 함께 전국 도서관, 학교, 단체 등에 배포될 예정이다.
그렇지만 현재 5.18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반응 일색이다.
본지( 한국시사경제저널 )가 5.18 특집 1회차 기사에서 판단한 바와같이, ‘5.18 북한군 침투설’에 대한 반박 근거 제시와 함께 학살 책임 지휘관과 계엄군들을 고발하는 등 일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발포 책임자 규명 등 핵심과제 여섯 가지가 끝내 ‘진상규명 불능’ 결정됐다.
때문에 전라남도는 보도자료를 통해 ‘논란이 된 시민군의 무기고 탈취 시점과 권모 일병 사망사건에 대해서는 기존 법원의 판결을 반영해 지난 2월 공개한 개별 보고서를 수정했으나, 여전히 계엄군 발포 최종 명령권자, 암매장 의혹 등의 진상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44년 만에 나온 진상보고서에 발포 명령권자 등 핵심 의혹을 밝히지 못한 점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하루빨리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돼 그날의 진실이 온전히 후대에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광역시 역시 아쉬운 결과에 대한 후속 조치로 항구적인 5.18 조사기구 설치와 함께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업기본법’ 제정 추진계획을 밝혔다. 이번 5.18 진상조사위의 미흡한 활동에 대한 대안 제시라고 할 수 있다.
광주·전남지역 200여개 이상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오월정신지키기 범시도민대책위원회는 “부실하고 왜곡·폄훼의 소지가 다분한 개별 직권조사보고서를 폐기하라”는 주장과 함께 “4년 6개월간 500억이 넘는 혈세를 쓰고도 왜곡과 부실로 점철된 개별 직권조사 보고서를 들고 무슨 면목으로 오월 영령을 뵙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체로키 파일 등 중요 문서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는 등 부실 조사를 했다는 점과, ‘진상규명을 위한 계획의 부재, 진영 정치를 대변한 위원의 활동 등 조사위 활동은 총체적 난맥상이었다’는 지적과 함께였다.
이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야간 정쟁과 어정쩡한 타협으로 이미 관련법이 통과된 후 2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야 겨우 출범식을 가졌을 만큼, 5.18 진상조사위는 출발 시점부터 ‘잘못 낀 첫 단추’의 전형이었다.
게다가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5.18 진상조사위는 2020년 78.6억원, 2021년 101.87억원, 2022년 137.4억원, 2023년 132.7억원, 2024년 68.9억원 등 활동 기간 동안 519.47억원이나 되는 정부예산이 배정됐었다는 점에서, 용두사미 결과에 대한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또한 부실·왜곡으로 가득한 개별 보고서 폐기 요구에 대해, 진상조사위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점은 또 다른 논란거리다.
종합보고서와 함께 전국 도서관, 학교 등에 만약 개별 보고서가 대거 배포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이에 5.18 진상규명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역사의 탑에 작은 돌 하나라도 더하는 심정으로 5.18 특집기사를 계속 이어가고자 함을 말씀드린다.
■ 차지철이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이유
박정희 유신정권,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하면서 당대의 실권자로 군림했던 차지철.
1934년 11월 6일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오천리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서울로 이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 제12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 육군 포병 갑종장교 시험에 겨우 합격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갑종장교( 甲種將校 )는 6.25 전쟁 전후 군 간부 요원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단기로 인원을 훈련시켜 군부대에 투입하기 위해 만든 과거 장교 양성과정 중 하나이다.
을종하사관과 동시에 창설, 같은 훈련을 받았어도 고교 졸업 이상은 갑종 장교, 그 이하 학력은 을종 부사관으로 임용했다.
1950년 1월 육군보병학교에 설치되어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15일 1기 363명이 임관한 것을 시작, 1968년 육군3사관학교 개교로 인해 갑종장교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230기 4만 5천 여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그래서 육사 시험에 낙방했던 경험 때문에, 차지철은 정규 육사 출신들에 대한 콤플렉스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청와대 경호실장 시절에는 육사 출신 소장이나 중장 계급 현역 장군을 자신의 부하인 경호실 차장으로 임명하곤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또 경호실 훈련을 진행할 때는 군복을 입은 채, 마치 자신이 군통수권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수도경비사령관 등의 장군들을 직접 지휘하는 엽기적인 행각을 보였다.
그런 차지철이 권력 핵심부에 처음으로 진입하게 된 계기는,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쿠데타에 공수특전단 대위 계급으로 적극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 5.16 군사쿠데타 직후 사진. 박정희, 나중에 연이어 경호실장을 맡았던 박종규(가운데)와 차지철( 군복 상의 수류탄 착용 ). 출처 : 국가기록포털 ] |
이후 박정희가 권력을 잡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경호차장을 맡았고, 1962년 3월 소령으로 진급한 후 불과 2개월 뒤인 5월 31일 중령으로 초고속 진급한 채 군에서 예편했다.
그리고 박정희 권유로 정치에 입문,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30세 나이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승승장구 1967년 제7대, 1971년 제8대, 1973년 제9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 이천군 선거구에서 계속 당선됐고 국회 상임위 국방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1974년 8월 15일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 날, 박정희를 겨냥한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의 저격으로 인해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는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5.16 군사쿠데타 동지였던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박정희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부터 시작됐다.
평범한 교사 신분이었던 박정희는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해서 장교가 되기 위해 혈서까지 써 보내서 입시에 합격한 바 있다.
이후 일본군 장교로 활동했으나 해방 후 친일파들 설자리가 없게 되자, 박정희는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사회주의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다.
그러다 여수 순천 사건 직후인 1949년 군대 내부 남로당 조직책 신분이 발각되는 바람에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함께 활동하던 남로당 동지들을 밀고하고 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6.25를 계기로 군에 복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뒤 5.16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았다. 진정한 소신이나 신념과는 무관하게, 항상 시대 조류에 맞춰서 권력에 편승하기 위한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발 빠르게 신념과 소신을 바꾸곤 했던 박정희는 18년 장기독재 기간, 항상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2인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이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언제 어느 순간 누군가 자신에게 도전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측근들에게 늘 서로 갈등을 유발하고 충성 경쟁을 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숙청과 토사구팽을 마다하지 않는 비정한 통치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도전할 기미가 보이거나, 과오·불충 등의 요소가 보이면 가차 없이 제거하고 쫓아내 버리는 일들이 여러 번 반복됐다.
그 결과 토사구팽했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뿐만 아니라, 자신의 충복이었던 이후락, 윤필용, 손영길, 박종규 등이 차례차례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발생한 1974년 무렵에는 믿고 요직을 맡길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런 이유로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책임지고 중정부장에서 물러나자, 1971년 자신이 직접 중정부장에서 3군단장으로 좌천시켰던 김재규를 검찰 출신 신직수에 이어 1976년 중정부장에 재등용하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1974년에 물러난 박종규 경호실장 후임으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차지철을 억지로 불러서 경호실장을 맡겨야 했다.
■ 차지철 부하 시절, 전두환의 굴욕적인 비화(祕話)
79년 10.26 박정희 피살 사건이 터지자, 당일 저녁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곧바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어서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사건 수사를 총괄 지휘할 합동수사본부장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임명하는 등 후속 조치가 이뤄졌다.
그런데 중간 수사 발표를 위해 전두환이 이틀 뒤인 79년 10월 28일 TV 방송에 등장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로 표현한다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상황이었다.
[ 1979년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0.26 사건 중간발표를 하는 전두환.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 |
벗겨진 머리와 이마 깊게 패인 주름,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표정, 국민 앞에 처음 등장한 전두환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그런데 그 강렬한 인상에 비례해서 궁금증이 확산되기 시작할 무렵, 국내에 앞서 외국 언론에서 먼저 정확한 상황을 알렸다.
불과 며칠 뒤인 79년 11월 1일자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라는 제목 기사가 실렸던 것.
그런데 과연 전두환은 외신기사 내용과 첫인상처럼, 원래부터 ‘실력자’나 ‘독재자’를 뜻하는 ‘스트롱 맨( strong man )’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을까?
[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제목, 79년 11월 1일 일본 마이니 신문 기사. 출처 : MBC영상 캡처 ] |
그러나 지나간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두환에게는 그런 강력한 실권자와는 전혀 거리가 먼, 매우 비굴하면서도 남부끄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1976년부터 차지철은 자신의 경호실장 직위를 장관급으로 상승시키고 그 밑에 육군 중장을 차관급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육사 11기인 준장계급 전두환을 작전차장보, 노태우를 행정차장보로 임명했다.
장군들을 자신의 직속 부하로 만들어서 위용을 과시하고, 자신이 육사 12기 시험에 낙방했던 콤플렉스를 은근히 설욕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신들보다 나이도 아래고 육사마저 낙방했던 차지철 앞에서, 조신하게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맡기 직전, 전두환은 제1공수 여단장을 3년 가까이 맡다 보니 점차 지겨워하던 시점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든든한 배경 역할을 해주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으로 쫓겨난 상황.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고, 출세를 위해서 청와대에 새로운 후원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차지철의 부하 역할인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과감히 맡기로 했던 것.
그런데 과거 전두환 밑에서 보안사에 근무하다 1980년 1월 ‘전두환 대통령 반대, 군 복귀’를 진언했다는 이유로 소령 계급으로 강제 예편당했던 김충립 목사가 최근 출판한 책에는, 당시 전두환의 굴욕적인 비화( 祕話 )가 생생히 담겨있다.
참고로 김충립 목사는 12.12사태 때 특전사 보안반장으로 근무했기에,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신군부 병력 총격에 의해 숨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그 이후 전두환의 권력장악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보았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김충립 목사가 자신의 책을 통해 증언하는 전두환의 숨은 굴욕사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유신정권 말기, 차지철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매주 경호실 주관으로 소속 부대 국기 하기식 열병, 분열 행사를 진행하곤 했다.
그때마다 단상에는 차지철에게 아부하려는 장관들이나 국회의원, 귀빈들이 자리를 함께했고, 차지철은 그 중앙에서 마치 자신이 대통령이라도 된 것처럼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연병장에는 경호실 소속 경찰, 경호원, 헌병, 55대대 병력 등 수많은 경호실 소속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전두환 장군이 제병 지휘관으로 부대 지휘를 맡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차지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면, 전두환은 목이 터져라 큰 목소리로 “경호실장님을 향하여 받들어 총!”이라고 외친 뒤, 뒤돌아서서 각 잡힌 자세로 차지철에게 ‘경례’를 했다.
보안사에 근무하면서 실제 그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던 김충립 목사는 자신의 책 속에서 그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를 지켜본 필자는 못 볼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남몰래 씁쓸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차지철의 위세에 눌려, 보안사령관에 임명된 1979년 3월 이후 10.26 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10개월 동안 박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으니 차지철과 전두환의 상하 관계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 도서출판 혜민기획 2024년 1월 25일 출판. 김충립 저, 「짓밟힌 서울의 봄」 162~163 페이지 )
■ 처절한 아부 끝에 승진했던 전두환, 그 의미는?
용산고등학교 졸업 후 육사 12기에 낙방한 차지철은, 일반 장교로 전두환보다 2년 먼저 임관했다. 그러니 군 경력으로는 차지철이 전두환보다 2년 선배였던 셈이다.
그러나 나이는 반대로, 전두환이 1931년생이고 차지철이 1934년생으로 전두환이 세 살 위였다.
그래서 1960년 차지철이 전두환과 함께 연수차 미국 육군기지 레인저 스쿨에 다녀올 무렵에는, 차지철이 전두환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차지철이 1961년 5.16 군사반란 시기 박정희 측근으로 활약한 후 국회의원 4선을 거쳐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자신의 상관이 되자, 전두환은 아부하기 위해 오히려 차지철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 「짓밟힌 서울의 봄」 198~199 페이지 )
그리고 1976년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기용된 이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주 경호실 국기 하기식 행사 때마다 차지철을 마치 대통령 모시듯 했다. 그렇게 해서 차지철의 총애를 받은 끝에, 마침내 1978년 제1사단장에 임명이 됐다.
전두환은 원래부터 강력한 실권을 휘두를 수 있는 실권자인 스트롱 맨( strong man )은 결코 아니었다.
10.26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오히려 전두환이 처절한 아부를 해야만 승진하곤 했다는 사실은, 이후 펼쳐질 12.12 사태와 5.18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 감사인사 드립니다
저희 한국시사경제저널은 2024년 3월 9일, 김건희 여사 디올백 전달자인 최재영 목사 인터뷰를 창간기념으로 내보내면서 그 첫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7월 3일 현재, 4개월 만에 누적 방문객 숫자가 6만여 명에 도달했습니다.
총선 특집기사를 내보냈던 4월, 그리고 5.18특집 기사를 올리기 시작한 6월 이후 특히 많은 분들이 방문해 주고 계십니다.
아직은 기존 거대 언론사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미약하기 짝이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꾸준히 관심갖고 방문해 주시는 독자분들께, 이렇게라도 감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인사를 올립니다.
앞으로도 방문하는 분들 숫자가 60만, 600만을 넘기는 순간까지 호시우행( 虎視牛行 )의 자세로 꾸준히 정진하면서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감사 인사드립니다.
( P.S : 주제에 상관없이 시, 소설, 수필, 칼럼 등 독자 투고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
정소앙 발행인 jsako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