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특집 ] ④ 5.18 직전 시대 상황 3 – 만약 전두환이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이 아니었다면

-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발탁된 배경
- 보안사령관 임명 직후 전두환의 위상
- ‘10.26 사건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 자신에게 칼을 겨눌 전두환에게 큰 칼을 준 정승화

정소앙 발행인
2024년 07월 13일(토) 14:26
[ 전두환 합수부에 의해 구속, 수형번호 105번을 달고 80년 재판정에 출두하는 정승화.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
[한국시사경제저널]

79년 10.26 사건 직후, 만약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이 아니었다면?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무력까지 동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하려는 시도 자체가 10.26 사건에 대한 수사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정권 탈취를 위해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의 권력을 향한 난폭한 폭주가 시작된 시점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래서 전두환이 10.26 사건 합수본부장을 맡았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애초에 전두환에게는 ‘10.26 사건 수사권’이 없었다. 비극의 출발점은 계엄사령관 정승화의 이해할 수 없는 무책임한 판단에서 시작됐다.

■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발탁된 배경

전두환 직전, 보안사령관을 맡고 있던 인물은 진종채였다. 경북 포항 출신으로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8기로 입학, 1949년에 임관했다.

고향이 경북으로 동향인데다 학교 후배인 덕분에 박정희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제8보병 사단장, 육군정보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등 요직을 거쳐 1975년 육군 보안사령관에 임명됐다.

이후 육·해·공군을 보다 편하게 일괄 관리하려는 박정희의 뜻에 따라, 1977년 중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 보안사령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 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런데 진종채가 국군 보안사령관을 맡던 해,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1977년 10월 중부 전선 보병 제20사단에서 GOP 철책선 방어 임무를 맡고 있던 부대 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전술 평가에서 사단 내 최하위 평가를 받았다( 일설에, 당시 담당 20사단 보안부대 농간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

해당 사단을 담당하던 보안부대는 유 중령이 맡고 있던 방책선에 구멍이 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1주일씩이나 내사하고도 정확한 원인 규명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안부대의 강한 내사 압박을 받게 되자, 유 중령은 사단에서 직접 현장 조사를 나온다는 통보를 받고 처벌이 두려운 나머지 월북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보안부대가 현장 조사를 나오기로 예정됐던 날, 날이 밝자마자 대대장 지프에 통신병을 태우고 북방 한계선 가까이 가서 유 중령은 운전병과 통신병에게 함께 월북할 것을 강요했다.

그런데 운전병이 이를 거절하자, 유 중령은 운전병 다리에 총을 쏴서 운전을 못하게 만들고 통신병과 함께 월북을 하고 말았다.

곧바로 이 상황을 전달받은 보안사령관 진종채는 박정희에게 “전방 20사단에서 대대장 유운학 중령과 통신병이 행방불명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북괴에 납치된 것 같다”는 허위 보고를 했다.

북한에 대한 대응책 준비와 우리 군의 사기를 고려, 관계기관 협의 후 사건전말을 보고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800여 명의 병사를 지휘하며 방책선을 책임지던 지휘관이 자진 월북한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해 박정희가 받을 충격과 후폭풍 역시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한 후 보고하겠다는 생각이 작용했다.

[ 당시 주한유엔군사령부는 보안사령부의 허위 보고를 토대로, 유운학 중령이 북괴군에 피랍됐다고 발표. 출처 경향신문 77년 10월 26일 기사 ]

그러나 권력기관 사이 충성 경쟁으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와 육군본부, 그리고 참모총장이 “납치된 것이 아니라 보안부대 책임 추궁 압력에 못 이겨 자진 월북한 사건”이라고 박정희에게 따로 사실보고를 했다.

당시 진종채는 1923년생으로 김재규보다는 3년, 정승화 참모총장보다는 6년, 그리고 차지철 보다는 11년이나 연장자였다. 그런데 차지철은 경호실장을 맡은 이후, 자신보다 연장자인 김재규 중정부장을 자신의 부하 대하듯 반말을 하면서 마치 부통령이라도 된 것처럼 위세를 부렸다.

당연히 김재규보다 연장자인 진종채 보안사령관 역시 차지철 입장에서는 불편한 상대. 결국 1979년 3월 초, 차지철은 진종채를 제거할 생각을 굳힌다.

그래서 1977년 10월 진종채가 박정희에게 했던 ‘유운학 중령 월북 사건 허위 보고’ 사실을 다시 들춰내서 경질 건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차지철이 박정희에게 진종채 보안사령관 경질 건의를 하기 하루 전날, 진종채가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고 사전 대응에 나섰다.

경질 건의가 예정된 다음 날 기상 시간 무렵, 진종채는 청와대로 달려가서 박정희가 어느 누구도 만나기 전 집무실에서 미리 대기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집무실에 나오자 77년 사건의 허위 보고 이유를 이실직고하고 보안사령관직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대로 있다가는 차지철 지시로 보안사령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구속까지 당할 판이니 아예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 후배이자 오랜 측근 중 하나였던 진종채에게 보안사령관을 물러나서 2군 사령관직을 맡으라는 지시를 함으로써 그 상황을 정리했다.

원래 제2군 작전사령관은 그 전신인 육군 제2야전군 창설 이래 계속 중장 계급 장성들이 맡았었다. 그런데 진종채가 79년 대장계급으로 제17대 사령관을 맡은 이래 지금까지 계속 대장계급이 맡고 있다.

그런데 진종채는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1, 2, 3군 세 명의 야전사령관 중 유일하게 유임되는 혜택을 받았다.

반면 신군부는 김학원 제1야전군사령관과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을 보직 해임시키고 그 자리에 반란군에 협조했던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과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임명했다.

또 진종채는 5.18 관련, 직접 계엄군 지휘계통에 있었고 소속 공수부대를 가장 먼저 출동시켰다. 그러나 발포 명령에 대해서는 줄곧 부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21일 당시, 광주 상무대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박수철 씨가 2019년 5월 18일 JTBC 인터뷰를 통해 이를 정면 반박하는 증언을 했다.

1980년 5월 21일 박수철 씨가 받았다고 증언한, 암호 통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폭도로 보이는 자들이 금일 20시 야음을 틈타 상무대를 습격하기로 돼 있는바, 모든 장병들은 자기 구역에서 맞교대를 실시하고… 수상한 자가 접근할 시에는 복부 이하로 사격을 가하여 제압하라. 보낸 사람 제2군사령관 진종채.’

박 씨가 기억한 통신문 전달 시각은 오후 7시 전후.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지 불과 몇 시간 뒤였다.

그러나 진종채는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5년 검찰 수사 시기, 소환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 처분됐다( 당시 진종채의 첫째 사위인 조준웅 검사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수사팀에 속해있었다. 그러다 장인인 진종채와 관련, 논란이 일자 수사팀에서 중도 하차하는 일이 있었다 ).

■ 보안사령관 임명 직후 전두환의 위상

진종채가 구사일생으로 구속을 피하고 제2야전군사령관으로 임명되던 1979년 3월, 후임 보안사령관에는 78년 제1사단장으로 임명되어 겨우 1년째 근무 중이던 소장 계급 전두환이 전격 기용됐다. 이때가 10.26 사건 불과 7개월 전.

그동안 보안사령관직은 중장 계급, 군단장급 인사가 임명되곤 하던 과거 관례와 비교할 때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다.

박정희의 5.16쿠데타 동지인 김종필이 미국 CIA를 모델로 창설, 초대 부장을 맡았던 중앙정보부는 민간 영역에서 장관, 국회의원, 대법원장쯤은 우습게 알 정도로 무소불위 힘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군 내부의 중앙정보부라고 할 수 있는 보안사령부는 모든 군 인사들 신상을 꿰뚫고 동향을 체크하는, 거대 정보 권력 기구였다( 1945년 11월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정보과에서 시작,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에 육군에 설치, 1968년 9월까지 유지됐던 ‘방첩부대’가 보안사령부 이전 명칭 ).

주요 군 인사들 성향과 충성심, 언행을 감시했고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곧바로 박정희에게 보고하는 체계였다. 그러니 직급상 상관인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마저도 보안사령관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훗날 전두환은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시작된 5·18 수사 당시,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 * *

문 :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1979년 3월 5일경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게 된 1980년 4월 14일경까지 재직했습니다.”

문 : 피의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나요.

“1979년 3월 5일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노재현 장관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법률상 임명권자는 국방부장관이지만, 내정 과정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 : 피의자는 누가 발탁했다고 생각하는가요.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노재현 씨가 평소에 박 대통령이 저를 총애하는 것을 알고, 저를 적극 추천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 배경은 어떤가요.

“당시 김재규, 차지철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은 등 박 대통령 주변 인물 몇몇 분 사이에 권력암투가 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자신의 측근인 문홍구 장군을, 차지철은 자신의 측근인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천거했으며,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저를 추천했는데, 박 대통령이 저를 직접 낙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 피의자는 10·26 사건 발생 직후 합수본부장에 취임했는데 결국 피의자의 당시 보직이 보안사령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12·12, 5·17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이 되고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문 : 그러면 피의자의 인생에 있어서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이 그 후의 인생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인가요.

“저는 그것이 인생에 있어 운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1995년 12월 3일 안양교도소, 제1회 전두환 피의자 검찰 신문조서 중 )

그런데 전두환의 증언과는 달리, 일설에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이 아니라 진종채가 직접 자신의 후임 보안사령관으로 전두환을 추천했다는 얘기도 있다.

필자 역시, 노재현 추천설보다는 진종채 추천설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한다.

12.12 군사쿠데타 시기 신군부가 무력 충돌을 일으키면서까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자, 노재현은 위기 대처는커녕 일국의 국방장관 체면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즉시 도망을 가버렸다.

그래서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동의서를 받기 위해 한동안 노재현을 찾아 헤매야 했다. 만약 노재현이 그 이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추천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신군부를 피해 도망갈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진종채는 전두환과 같은 경상도 출신에다 하나회의 후원자였다. 때문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추천한 것은, 노재현이 아니라 진종채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종채는 이미 차지철의 견제로 인해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하는 데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77년 유운학 중령 월북 허위보고 사건까지 벌어지고 나자,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임명됐을 무렵에는 어쩌다 간혹 하던 보안사령관 대통령 독대 기회마저 아예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보안사령부의 군 관련 각종 보고서는 차지철에게 사전에 보고됐고, 이후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종합해서 보고하는 관행이 유지됐다.

마찬가지로 김재규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 기능을 축소, 중정이 보안사를 직접 통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중정 소속 김기춘 검사를( 훗날 박근혜 정권 청와대 비서실장 ) 파견, 보안사 기존 편제인 ‘정보처’를 ‘방산처’로 바꾸고 모든 민간인 정보업무를 금지했던 것.

아울러 보안사 요원이 군부대 내에서 사복을 입고 근무하던 관행을 없애고 군복을 입게 하는 등, 치밀한 견제와 함께 보안사 위상을 대폭 축소시킨 상황이었다.

■ ‘10.26사건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2023년 11월 22일 개봉, 13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국내 상영 영화 역대 9위의 성과를 보인 영화 ‘서울의 봄’. 그 첫 장면은 79년 10.26 사건 당시 여러 장성들이 소집된 가운데, 박정희 서거 소식을 알린 비상국무회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04시,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상호( 실제인물 정승화 )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한다.

“대통령 권한대행께서 임명하신 바대로, 계엄사령관직을 맡은 정상호입니다. 계엄법에 따라 합동수사본부장은 여기 계신 전두광( 실제인물 전두환 ) 보안사령관이 맡을 예정입니다”

그러자 전두광이 일어서서 정승화를 향해 경례를 함으로써,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직 임명 절차가 완결됐다.

이와 관련, 전두환은 인생 말년에 출판한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할 합동수사본부장은 보안사령관이 맡게 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근 2024년 6월 26일로 활동이 종결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의 종합보고서 역시, 전두환 합수본부장 임명의 근거로 계엄법을 들고 있다.

[ 5.18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 1권 81페이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임명 근거 ]

5.18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월 27일 계엄법 제11조 및 제12조, 충무계획1200(계엄) 시행계획을 근거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합동수사기구 설치계획」을 승인했다.

계엄공고 5호를 통해 합동수사본부는 계엄법 제16조에 규정된 범죄의 수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합동수사기구 설치계획」은 합동수사본부가 보안사, 헌병대, 경찰, 중앙정보부, 검찰, 군검찰 등 정보수사기관을 조정·감독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 ‘설치계획’ 안에는 수사1국과 정보국, 기획실을 보안사령부가 장악하고, 모든 사건은 사전에 조정통제국의 조정을 받도록 명시하였다. 합동수사본부와 전두환은 ‘10·26’ 수사를 비롯한 계엄 정국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국무위원들보다 먼저 박정희 사망 사실을 확인한 전두환은 10월 26일 23시부터 24시 사이에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사무실에서 박준광 보안사 법무관에게 ‘합동수사본부 설치안’을 작성하여 계엄사령관의 결재를 받으라는 지시를 하였다.

박준광이 작성한 「합동수사기구 설치계획」안은 10월 27일 새벽 전두환이 정승화의 결재를 받았고, 같은 날 오전 10시10분 ‘계엄공고 5호’를 통해 공포되었다.

아울러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김재규 체포지시를 받은 시각보다 앞서 10월 26일 21시경 보안사 한용원 정보1과장에게 5·16 당시의 국난 극복 사례를 종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이상, 2024년 6월 24일 국회와 대통령에 보고,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 1권 81~82 페이지 내용에서 인용 )

그런데 바로 그 ‘「합동수사기구 설치계획」안’을 작성한 당사자이자 당시 전두환의 법률 참모였던 박준광 전 법무관은 2020년 5월 28일 JTBC 인터뷰를 통해, 5.18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가 정리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증언을 했다.

[ 과거 79년 전두환 보안사령관 법률 참모였던 박준광 전 법무관 2020년 5월 JTBC 인터뷰 영상. 출처 JTBC 뉴스 캡처 ]

“10.26이 나기 전에 8월 달에 을지훈련이 있었어요. 계엄에 관한 규정에 대해서 브리핑을 해달라고 사령관의 요청이 있어서…

그럼 보안사의 안은 어떤지 그걸 만들어봐라( 라는 지시가 있어서 ) 보안사의 안으로 해서 간단하게 만들어서 그 후에 보고를 한게 있고, 그걸 갖고 부산 부마사태 때 한 번 사용했고요. 보안사 부산 보안부대장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중앙정보요원이 리드하듯이 주도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러면 그 지시에 합수부장은 보안사령관으로 하라 이렇게 된 겁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뭐, 특별히 그런 이야기는 안했지만 그 뜻은 거기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만들었죠.”

이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 해보자. 대다수 국민과 영화 ‘서울의 봄’, 그리고 5.18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에서 당연시했던 ‘계엄령 하 합동수사본부장은 보안사령관이 맡는다’는 내용은 당시 계엄법에 전혀 없었다.

만약 그런 내용이 법률에 이미 규정돼 있었다면 그냥 그대로 시행하면 될 일, 전두환이 굳이 법률 참모에게 기획안까지 미리 준비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5.18 진상조사위가 종합보고서에서 언급한 계엄법 제11조는 ‘계엄의 해제’에 대한 내용이고, 제12조는 계엄 해제 이후 ‘행정ㆍ사법 사무의 평상화’에 대한 내용이다.

필자가 파악한바, ‘보안사령관을 합수본부장에 임명한다’는 유일한 법적인 근거는 「계엄사령부 직제」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군본부 비상사태 조치계획에는 ‘충정계획에 합수본부를 둘 수 있다’는 딱 한 줄짜리 문장만 있다 ).

「계엄사령부 직제」 제7조( 합동수사기구 ) ③ 합동수사본부장은 정보수사기관에 소속한 현역장성급 장교 중에서 계엄사령관이 추천한 자를, 법 제6조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계엄의 시행을 국방부장관이 지휘·감독하는 경우에는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이 지휘·감독하는 경우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며, 합동수사단장은 정보수사기관에 소속한 현역 장교 중에서 계엄사령관이 임명한다.

그런데 이 「계엄사령부 직제」는 ‘법률’이 아니라 ‘대통령령’이다. 게다가 1981년 12월에 개정된 내용이고, 12.12 사태와 5.18을 거쳐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이, 보다 근거를 확실히 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 사망과 정권 붕괴, 그리고 계엄 시 합수본부장을 누구로 정한다는 규정이 없는 혼란을 틈타서 전두환이 재빨리 권한을 가로챘던 것이다.

게다가 전두환이 10.26 이전에 보안사가 주도하는 계엄 하 합동수사본부 기획안을 이미 준비시켰으나, 중앙정보부 힘에 눌려서 부마사태 때는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10.26 전까지는 차지철과 김재규가 박정희 다음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혈투를 벌이던 상황. 보안사령관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합동수사본부장자리를 맡긴다는 내용이 계엄법에 담겨있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오죽하면 보안사령관이 대통령과 독대하던 권한도 없애버리고 보안사를 중앙정보부가 직접 통제·관리까지 하던 상황 아니던가.

이와 관련,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증인 김충립 목사의 책에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1979년 3월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임명됐을 때 그 이전에는 지원부대가 을지훈련을 실시할 경우, 보안사령부는 군사 보안업무를 지원하는 정도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달랐다.

1979년 6월, ‘을지훈련’을 하던 중 법무참모 박준광 소령에게 “계엄 선포가 된 후, ‘합동수사본부’ 설치 근거와 조직, 기능에 대해 연구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020년 JTBC 인터뷰에서 박준광 씨는 을지훈련 시기를 8월로 증언 ).

그리고 10월 18일 부마사태가 발발하고 계엄이 선포되자 부산지역 보안부대에 계엄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도록 지시했으나 중앙정보부 부산 분실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전두환이 박준광 소령에게 “계엄 후에도 보안사령부가 중앙정보부를 조종, 통제, 감독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박 소령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중앙정보부는 <법>에 의해 만들어진 상위 기관이고 보안사령부는 <대통령 령>에 의해 설치되었기 때문에 하급 법인 대통령 령에 의해 만들어진 보안사령부는 계엄이 아닌 평시에는 중앙정보부를 조종, 통제, 감독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합수본부장이 직권으로 참모총장, 대통령까지 조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다시 내리자, 며칠간 고민하던 박 소령은 그런 규정은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했다.

그러자 “그러면 규정을 새로 만들거나 법을 고치는 방안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전두환이 재차 내렸지만, “그건 불법입니다.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의 부하입니다. 부하가 상관을 직권으로 조사할 수는 없으며 이런 법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 김충립 「짓밟힌 서울의 봄」 173 ~ 185 페이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 자신에게 칼을 겨눌 전두환에게 큰 칼을 준 정승화

그런데 그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던 사람은 바로, 계엄사령관 정승화였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다루겠지만, 전두환의 쿠데타 시도는 12.12나 5.17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30대 초반 소령 계급 시절인 1963년에도 대위 노태우 등과 함께 쿠데타 시도를 했었다.

그때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재춘 장군이었고, 그 밑에 전두환과 노태우가 전속부관으로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안사령관으로 명칭이 변경된 ‘방첩부대장’을 맡고 있던 사람이 바로 정승화 준장이었고, 사전에 쿠데타 계획이 정승화에게 발각되어 전두환, 노태우가 체포된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정승화와 전두환은 아주 질기고 오래된 ‘악연’이 있었던 것.

10.26 사건이 일어난 직후, 과거 중정부장이자 전두환, 노태우의 상관이었던 김재춘 장군이 정승화를 만나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김재춘과 정승화는 육사 5기 동기 ).

“1963년 쿠데타 사건 조사를 한 후 이 사건을 주도했던 전두환 소령과 노태우 대위 등을 처리하지 못하고 살려 준 것은 잘못한 일이었다. 그때 살려준 전두환 합수본부장과 노태우 장군이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다시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으니 조심하라”

그러나 정승화는 “이번에는 그때에 처리 못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마라.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라고 자신 있게 답변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보안부대원에 의해 감청되어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돼 12.12 쿠데타를 거행하게 된 원인이 됐다( 김충립 「짓밟힌 서울의 봄」 36페이지 ).

전두환이 30대에 쿠데타를 처음 시도했을 때부터, 정승화는 방첩부대장을 맡고 있던 상황에서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지닌 음험한 위험성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전두환을 경계하라는 중요한 충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자기 목에 칼을 겨눌 자에게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칼을 쥐어줬다.

박정희에게 총을 쐈던 김재규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합수본부장을 검찰총장이나 경찰총장에게 맡겨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만약 군이 나서서 수사를 지휘하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헌병감을 합수본부장에 임명해도 됐을 일.

방심이 아니면 무능, 그 어떤 이유에서건 정승화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두환 합수본부장 임명 조치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참담한 비극이 탄생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에 맞섰던 강직하고 정의로운 이미지의 정승화는 잘못된 묘사였다.

만약 전두환이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이 아니었다면, 12.12 사태와 5.18은 없었다.

정소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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