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앙 칼럼/계엄 특집] ④총성이 난무했던, 합수부의 정승화 연행 작전

- 암호명 ‘생일집 잔치’ 유래
- 초저녁, 일상을 깨트린 한남동의 총소리
- 피투성이 아수라장이 된 육군 총장공관, 연행되는 정승화
- 초기 피해와 반란군 - 진압군 공방 직전 상황

정소앙 발행인
2024년 10월 31일(목) 15:18
[ 1996년 8월 26일 12.12 및 5.18 1심 선고공판. 손을 잡고 서 있는 전두환과 노태우.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월 구형.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국시사경제저널]

계엄령하에서 계엄사령부는 국민 기본권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마저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된다.

그러나 12.12쿠데타는 치밀한 작전을 통해, 그 강력한 권한마저 일시에 무력화시킬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운명의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

보안사 바로 맞은편 경복궁 30경비단에 신군부 측 장성들이 일제히 집결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참석자들은 전두환 합수부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예정된 시간이 지났지만, 전두환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초조해하며 궁금해하는 가운데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중장 등이 전두환이 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30 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이,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 결재를 받으러 삼청동 총리공관에 갔다는 사실을 알리며 시바스 리갈 양주를 커피잔에 따라서 한 잔씩 돌렸다.

암호명 ‘생일집 잔치’, 12.12 군사쿠데타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됐다.


■ 암호명 ‘생일집 잔치’ 유래

그보다 앞선 12월 7일, 당시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 소장은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서울에 잠깐 다녀가라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그러자 다음 날, 노태우는 상관인 1군단장 황영시 중장으로부터 외박 허가를 받아 서울로 나왔다.

이와 관련, 소설가 천금성은 12.12쿠데타 주도 인사들 증언을 토대로 썼던 「10·26, 12·12, 광주사태」를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가 바로 이날 거사의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쿠데타 주역 중 한 사람인 71 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경우는 좀 특이한 케이스였다. 12.12 이후 노태우 뒤를 이어 9사단장을 역임했던 백운택은 전두환과 같은 육사 11기에 하나회 멤버였다. 그러나 활동이 다소 소원했고 11기 가운데 뒤늦게 3차에 가서야 장군 진급을 했다.

같은 기수 동기였지만 전두환보다 두 살이 어렸던 백운택은 전두환을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 그래서 장군 진급에도 전두환의 도움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였는지 계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2.12 직전 시기 백운택은 거의 매일 일과 후 보안사령부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12일 오후 5시쯤, 백운택이 보안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어서 전두환의 수석부관 황진하 소령과 통화를 했다.

“나 백 준장인데 오늘 ‘생일집 잔치’는 예정대로 진행하는가?”

“예, 변동사항 없습니다.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알았다. 그럼 지금 출발한다.”

이 얘기를 소설가 천금성이 백운택에게 직접 듣고 세상에 알렸다. 12.12 군사쿠데타 암호명이 ‘생일집 잔치’라고 알려진 배경이, 바로 이 백운택의 증언이었던 것이다. ( 「12★12. 폴리티쿠스. 67~72 페이지 )


■ 초저녁, 일상을 깨트린 한남동의 총소리

정승화 연행을 위한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총리공관으로 떠나기 전.

전두환은 자신의 측근인 보안사 소속 우경윤, 허삼수, 허화평 대령에게 ‘차질 없이 임무를 수행하라’는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합수부 수사1국장인 이학봉 중령과 함께 삼청동 총리공관을 향했다.

[ 1988년 국회 문공위 언론청문회에 출석한 허화평(우측 첫 번째), 허삼수(좌측 두 번째) 증인.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사전에 계획은 이미 치밀하게 준비된 상황.

허삼수 대령은 곧바로 육군 참모총장 공관으로 전화를 걸어서 자신을 보안사 정보처장이라고 속이고 총장 수행부관인 이재천 소령( 육사 28기 )과 통화했다.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은 육사 15기 권정달 대령이었고 허삼수는 보안사 인사처장이었다.

권정달이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던 점과, 총장에게 보안사 인사처장이 보고한다고 말하면 의심을 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정보처장으로 행세하도록 전두환이 미리 지시를 했던 것.

정승화 면담을 위해 저녁 7시 전까지 총장공관으로 오라는 이재천 수행 부관 말을 듣고, 통화를 마치자마자 허삼수와 우경윤 두 대령은 총장공관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8명의 보안사 수사관과 함께 2대의 일제 슈퍼살롱 차에 나눠 탄 상태였다. 그리고 합수부에 배속된 33헌병대 1개 중대 60명 병력이 마이크로버스 2대에 분승, 그들 뒤를 따랐다.

당시 합수부 측 헌병 병력을 지휘한 장교는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과 33헌병대장 최석립 중령, 그리고 육군참모총장 공관 경비병 직속상관인 육본 헌병대장 이종민 중령 등이었다.

훗날 준장으로 예편한 육사 18기 성환옥은 노태우 정부 청와대 경호실 차장, 감사원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리고 최석립은 육사 19기, 소장으로 예편한 뒤 노태우 정부 청와대 경호실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이들 중 성환옥과 최석립은 전두환이 비밀리에 키워 온 하나회 핵심 멤버들이었고, 이종민은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

전두환과도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이종민은 사전에 12.12거사에 대해 전혀 귀띔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성환옥 대령과 육사 동기였기에 뒤늦게 정승화 총장 연행 작전에 전격적으로 참여시켰다.

이종민이 육본 헌병대장이라는 점 때문에, 공관 경비병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위에는 외무부장관,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해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등 6개 공관이 밀집해 있었다.

당시 6개 공관 외곽 경비는 해병대 병력이 담당하고 있었다. 공관 정문 경비병들은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부터, 7시쯤 보안사 정보처장이 총장에게 보고하러 오기로 되어 있으니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미리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허삼수, 우경윤 대령 일행은 공관에 도착했을 때 별 의심 없이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헌병 중대가 탄 마이크로버스 2대와 헌병 백차가 공관 입구 슈퍼마켓 근처에서 대기하다 10분 후 정문 초소에 진입했을 때였다.

경비병이 차를 세우고 헌병 백차에 탄 지휘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지휘관은 “계엄 상황이기 때문에 총장공관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다”라고 대답했다.

사병 58명과 장교 3명, 사전 통보도 전혀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많은 인원이 진입을 시도하자, 경비 중이던 헌병 중사가 확인을 해야겠다면서 전화통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마이크로버스에서 헌병들이 우르르 뛰어내리더니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는 고함과 함께, 순식간에 경비실로 들어가서 경비병 3명의 무장을 해제하고 묶어버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고, 해병경비대 본부는 정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허삼수, 우경윤 대령 등이 탄 승용차 2대가 총장공관 정문에 도착했을 때, 총장 당번병 김영진 병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어서 성환옥 대령과 이종민 중령, 보안사 수사관 2명이 공관 정문에서 내려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은 직속상관인 이종민과 함께 그들이 들어오자, 아무 의심 없이 경례를 붙이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보안사 수사관 2명은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들고 경비병들로부터 M16 소총을 빼앗아 무장을 해제시켜 버렸다.

나머지 보안사 수사관 중 영관급 장교 2명이 허삼수와 우경윤을 뒤따르는 가운데, 4명의 수사관들은 타고 온 승용차 트렁크에서 싣고 온 M16 소총을 꺼내 들고 현관 쪽으로 엎드려 쏴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 시각 정승화 총장은 외출 준비를 마친 채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부관 이재천 소령으로부터 보안사 정보처장과 육본 범죄수사단장이 급한 보고차 찾아왔다는 인터폰 연락을 해왔다.

이윽고 정승화가 응접실로 내려와 허삼수와 우경윤을 향해 급한 보고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잔뜩 긴장한 허삼수가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 1996년, 12.12-5.18 선고공판에 출석하는 허삼수 피고인.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총장님께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그래서 총장님 진술을 좀 받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졌다.

“뭐?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하던가! 김재규가 그렇게 주장했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상부로부터 총장님 진술을 녹음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그럼 녹음기는 가져왔나?”

“죄송하지만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곳까지 가셔야겠습니다.”

“이놈들이! 누가 그따위 지시를 했나?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했어?”

“네, 대통령 각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허삼수는 안에 신문지가 들어있는 노란 서류봉투를 보였다. 대통령 재가가 이미 난 것처럼 속이려는 눈속임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대통령이 직접 전화라도 했을 텐데,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런 조사에는 응할 수 없어!”

정승화가 부관을 소리쳐 부르며 벨을 눌렀다. 그러자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이 응접실로 달려왔다.

“대통령이나 장관에게 전화 대!”

정승화가 고함을 지르자 이재천 소령은 다시 황급히 부관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순간, ‘탕 탕 탕!’ 부관실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공관 건물 밖에서도 ‘드르륵, 드르륵!’ M16 소총 연발음이 울렸다.

시각은 정확히 저녁 7시 20분.

한남동 남산 1호터널과 한남대교를 잇는 도로 위,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 속 시민들에게도 그 난데없는 요란한 소총 연발음이 들렸다.

한순간 평온한 일상을 깨트린 한남동의 총소리, 한 치 앞을 전혀 알 수 없는 혼돈이 시작됐다.


■ 피투성이 아수라장이 된 육군 총장공관, 연행되는 정승화

이재천 총장 수행부관이 황급히 부관실로 뛰어 들어가서 전화통을 붙잡았을 때였다. 응접실에서 고함소리가 들리자, 총장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가 권총을 뽑아 들고 서둘러 출입문을 향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보안사 수사관들 역시 권총을 뽑아 들고 망설임 없이 김인선 대위와 이재천 소령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 보안사 수사관들은 10.26 사건 발생 직후 궁정동 안가 사건 현장을 조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때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경호실 요원들 시체를 직접 확인했던지라 총장 연행에 실패하면 관련된 모든 사람이 죽을 거라고 판단, 가차 없이 권총을 쐈던 것이다.

그 순간 응접실에서는 허삼수와 우경윤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 정승화의 양쪽 팔을 붙잡고 연행을 시도하고 있었다.

고함소리가 계속 터져 나오자 응접실로 달려온 총장공관 관리장교 반일부 준위와 당번병 김영진 병장이 그때 이들과 마주쳤다.

정승화가 양팔을 붙잡힌 채 끌려 나오는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이 허삼수와 우경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다 비상을 걸어야 한다는 다급한 생각에 김영진 병장은 비상 전화가 있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마찬가지로 경비병들에게 알리기 위해 현관으로 뛰쳐나와 정문 경비실을 향하던 반일부 준위를 향해 총알이 어지럽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공관 마당에서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보안사 수사관들의 사격이었다.

간신히 총알을 피해 마당을 가로질러 반 준위가 경비실에 도착했을 때, 경비실 옆에 붙어있는 내무반 안에서는 경비병들이 바닥에 엎드린 채 사복 차림들이 M16 소총으로 이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 순간 내무반 안의 사복이 반 준위를 발견하자 곧바로 드르륵 사격을 해왔다. 순간적으로 외곽 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를 떠올린 반 준위는 또다시 날아오는 총알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해병대 막사를 향해 달려갔다.

마침내 해병대 막사에 도착해서 반 준위가 총장공관에 괴한이 나타났다고 알릴 무렵.

공관 응접실 밖에 있던 보안사 수사관 한 명이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응접실 대형 유리창을 와장창 깨면서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가자고 하면 빨리 따라갈 것이지, 뭘 꾸물대!”라고 외치면서 그 수사관이 소총 총구로 정승화를 위협했다. 순간, 총구를 너무 얼굴 가까이 들이대는 바람에 정승화의 안경이 총구에 걸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허리를 굽혀 다시 안경을 주워 낀 정승화는, 뭔가 오해가 생겨서 대통령이 조사를 지시한 것으로 판단, “그럼 가자”면서 그들을 따라 나섰다.

이와 관련, 1985년 초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은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12.12쿠데타의 발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 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을 총장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러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지금 총상을 입은 당사자는 하반신을 못 쓰고 있어요” ( 신동아 1985년 4월호 )

이때 노태우가 말한 ‘총상을 입은 당사자’는 허삼수와 함께 정승화를 연행하려 했던 우경윤 대령이었다.

그러나 당시 총장공관에는 우경윤을 향해 총을 쏠 만한 경비병이 전혀 없었다. 정문 경비병들은 이미 초기에 무장해제 상태로 감금돼 있었다. 공관 내부에서 유일하게 권총으로 무장을 했던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는 부관실에서 수사관들 총에 맞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유일한 경우의 수는 정승화가 응접실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야! 빨리 나가서 사격 중지 시키지 못해!”라고 소리 질렀을 때, 밖으로 뛰쳐나간 우경윤을 보안사 수사관들이 오인 사격했을 가능성뿐이다.

1996년 검찰 수사 발표에서도 우 대령이 총에 맞은 것은 합수부 측 오인 사격으로 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육사 13기인 우경윤은 옆구리가 관통되면서 척추 신경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어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러나 계속 현역으로 근무하다가 육본 헌병감을 역임한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

[ 79년 12월 14일, 보안사령부에서 전두환을 비롯한 12.12쿠데타 세력 자축 사진 촬영 모습.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 초기 피해와 반란군 - 진압군 공방 직전 상황

당시 한남동 총장공관 경비대장은 황인주 소령이 맡고 있었다. 그런데 순찰 도중 국방부장관 공관 위병초소에 들렀을 때,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대여섯 발이 잇달아 울린 것으로 볼 때, 순간적으로 단순 오발 사고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기동타격대 비상!”

국방부장관 공관 위병초소 경비전화를 통해 기동타격대 비상을 건 황인주 소령은 100여 미터쯤 떨어진 해병 경비대 막사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고 탄약고에 보관중이던 실탄을 개봉하고 기동타격대에 분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때마침 육참총장공관 관리장교 반일부 준위가 경비대 상황실로 거친 숨을 내쉬며 뛰어 들어왔다.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괴한들이 침입했습니다!”

반 준위가 곧바로 괴한들이 총장을 납치해 가는 중이라고 황 소령에게 알렸다. 그러자 황인주 소령은 상황실에서 실탄 분배를 확인하고, 반일부 준위와 함께 급하게 밖을 향했다.

그런데 복도를 지나 막 막사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 반대편 방향에서 우르르 몰려온 육본 헌병 병력들이 반 준위와 황 소령을 향해 사정없이 소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면서 동시에 어지럽게 군화 발길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총장공관에서 총성이 울리자마자 작전 개시에 나선, 합수부 측 33헌병대 소속 병력들이었다. 33헌병대장 최석립 중령 지시에 따라, 해병경비대 지휘 체계와 통신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목적.

그들은 공포를 쏘면서 황인주 소령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 개머리판으로 무수히 구타를 했다. 마찬가지로 반일부 준위와 해병대 경비병 6명 역시 이들의 구타로 인해 심한 부상을 당했다.

어찌나 심하게 구타를 당했던지, 반 준위는 손톱이 다 빠질 정도였다. 그리고 맞아서 쓰러진 이후에는 총구를 겨눈 채 헌병 몇 명이 반 준위 위에 올라타고 군화발로 사정없이 밟아대는 바람에 반 준위는 마침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이전, 총장 부관실에서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는 눈 부위와 허리, 대퇴부 팔 등 모두 5발의 총상을 입었다. 다음날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돼서 수술을 받았지만, 머리와 척추에 박힌 총알은 빼내기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에 제거하지도 못하고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아야 했다.

마찬가지로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은 옆구리에 맞은 총알이 간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뱃속에 박혔었다. 심한 출혈 때문에 사경을 헤매다, 혈액 11병의 수혈을 받으면서 진행한 대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비슷한 시각, 해병대사령관인 김정호 중장도 총소리를 들었다. 곧바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무장 한 채 김 중장은 해군본부에 기동타격대 출동을 요청했다.

그때 해병경비대 상황실에서 실탄을 분배받았던 해병 기동타격대 병력들은 자신들 직속 상관인 황인주 소령이 갑자기 나타난 육본 헌병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해병 기동타격대 병력들은 막사 주위로 신속히 흩어져서 막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일부 병력이 해병대사령관 공관으로 달려가서 김정호 중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무슨 일이야!”

“육본 헌병 복장을 한 괴한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경비대 막사를 점거해 버렸습니다. 현재 경비대장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뭐야? 총성이 처음 났던 곳은 어디인가?”

“육군참모총장 공관 쪽입니다!”

그러자 해병대사령관 김정호 중장이 단호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지금부터 내가 직접 지휘한다. 누구든지 움직이면 수하( 누구냐고 묻는 군대용어 )를 하고, 응하지 않으면 즉각 발사하라!”

그리고 전열을 정비한 김 중장은 해병대 병사들 호위를 받으면서, 어둠이 깔린 총장공관 정문을 향해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소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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