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앙 칼럼/계엄 특집] ③계엄령 속 12.12쿠데타 실제 발생배경과 ‘소년이 온다’ 주인공 ‘동호들’이 내준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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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정소앙 칼럼/계엄 특집] ③계엄령 속 12.12쿠데타 실제 발생배경과 ‘소년이 온다’ 주인공 ‘동호들’이 내준 숙제

- 계엄령 속 12.12쿠데타 실제 발생배경
- ‘소년이 온다’ 주인공 ‘동호들’이 내준 숙제

[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 작품, ‘소년이 온다’ 표지 ]
[한국시사경제저널]

전두환이 권력을 향한 거칠고 잔혹한 질주를 시작한 시점은 79년 계엄사령부 합수본부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이후 결정적인 계기이자, 운명을 건 두 차례의 도박은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이었다.

이와 관련 12.12쿠데타를 소재로 2023년 개봉했던 영화 ‘서울의 봄’이 관객 1천3백만 명을 돌파, 역대 9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둔 요인 중 하나는 ‘철저한 고증’ 작업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치명적인 사건을, 영화 한 편에 모두 담기에는 힘들었던 것일까?

영화 ‘서울의 봄’에는 객관적인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들이 있다.

계엄령 속, 전두환 신군부가 감행했던 12.12쿠데타는 이후 국회의 계엄 해제 권한을 무력화시키는 출발점이었다. 쿠데타가 벌어졌던 실제 배경을 이제부터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

■ 세계 7대 IT 보안업체 ‘웨어밸리’ 대표의 특이한 그림 전시회

서울 남산 중턱에 있는 갤러리 U.H.M에서는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17일까지 한 IT 기업 대표의 개인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주인공은 2001년 설립 이후, 미국 IT 컨설팅 업계 대표주자인 가트너( Gartner. Inc. )로부터 10년 연속 세계 7대 DB 보안업체로 선정된 ‘웨어밸리( Warevalley )’의 손삼수 대표.

학창 시절에는 미술부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IT업체 대표가 60대 후반인 2020년부터 그림을 배워 개인전까지 연다는 것, 그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노년의 여유가 느껴지는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 중에는, 매우 특이한 작품들이 있었다.

전두환과 1983년에 방한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포옹하는 장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을 이끌었던 일왕 히로이토와 전두환이 1984년 만나서 악수하는 장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전두환과 손삼수 대표는 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개인전에까지 그런 장면을 그림으로 등장시켰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 상상 속 타임머신을 타고 1979년 연말 시점으로 잠시 되돌아 가보기로 한다.

마침 올해 2024년 5월 18일, 477페이지 제법 두툼한 분량의 「12.12 – 정승화, 장태완 등 관련자 100인의 증언과 사진으로 재구성한 12·12 그날의 진실」이라는 책이 폴리티쿠스를 통해 출판됐다.

저자는 광주 출신으로 서울대 재학 중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1984년 한국일보에 입사, 1993년 김영삼 정부 당시 ‘12.12’를 심층 취재하여 장기 연재했던 이계성 전 한국일보 기자이다.

사실에 기초해서 12.12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나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 필자가 이 칼럼에서 다룰 역사적인 사실이나 숨겨진 진실들은 상당 부분 이 책에서 인용함을 말씀드린다.


■ 전두환과 정승화,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26 사건 직후인 79년 11월 6일, 3군 사령부 방문을 시작으로 예하 부대 순시에 나섰다. 그때 1, 2, 3군과 군수사령부 대령 이상 지휘관, 참모들을 집결시키고 특별 훈시를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 장례도 끝나고 정치발전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드높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일단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정치발전에 대한 군의 견해가 조속히 일치되고 군은 다른 잡념 없이 오직 국토방위 임무에만 힘과 노력을 쏟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 중략 )

10.26 이후 상황은 혁명도 변혁도 아니다. 단지 대통령 유고라는 불상사가 생겨서 국민이 새 대통령을 뽑을 때까지 치안 유지를 위한 계엄이 실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지금은 군이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던 5.16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숙해 있고 군보다 민간 부문이 훨씬 더 발전해 있다. 군의 능력이 가장 뒤떨어져 있다.

경제도 발전하여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이런 때 또다시 군이 정치판에 뛰어들면 경제는 퇴보하고 정부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이다.

우리는 국방에만 전념해도 벅차다. 군이 국방 이외에 참견하면 군도, 나라도 그르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군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이 참모총장으로 있는 한 절대로 군의 정치 간여를 허용치 않을 것이다” ( 「12.12」. 폴리티쿠스. 40 ~ 42페이지 )

[ 전두환 합수부에 의해 구속, 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던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그러나 정승화 사령관 생각과는 정반대로, 전두환은 이미 10.26 사건 이전부터 정치에 깊숙이 관여할 생각을 은밀히 품고 있었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10월 18일 부산과 마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러자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현지에 헬기를 타고 내려가서 상황을 직접 파악했다. 그리고 상경하자마자 당시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에게 시국 수습에 대한 ‘중요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전두환은 이 보고서를 박근혜를 통해, 10월 27일쯤 박정희에게 보고할 계획을 세웠다. 시국 혼란이 가중되고 권력 내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정부장의 대립이 커지는 상황, 국민 지탄을 받는 인물 제거와 함께 부정부패를 척결해서 국정을 쇄신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보고서를 전달하고 국정에 참여할 기회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전두환은 박정희 대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찾기 시작했다. 다음은 정승화의 증언이다.

- 11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장군이 내 집무실로 찾아와 “총장님, 이번 계엄 기간에 그동안 부정 축재한 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해서 국가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하시지요”라고 건의했다.

그는 수 명의 이름을 열거했는데 전·현직 고관과 정치인, 그리고 일부 경제인 등 세간에 축재했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람들이었다.

전두환 장군은 “지금 부정 축재자 수 명을 골라서 그 재산을 압수하고 공개하는 것쯤은 우리 수사관들을 동원해서 간단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거듭 하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부정 축재가 국민 원성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자들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정당한 법적 절차가 필요한 일이라는 말로 전두환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며칠 뒤 전두환이 다시 찾아와서 “부정 축재자 중 우선 몇몇 대표적인 인물을 골라서 본보기로 비밀리에 조사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재차 건의하자, 나는 법에 의한 조사를 다시 한번 강조한 뒤 우선 조사할 명단을 은밀히 작성·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12.12」. 폴리티쿠스. 43 ~ 44페이지 )

전두환은 5.16 직후 박정희가 쿠데타에 대한 국민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부정 축재자 처벌과 함께 재산을 환수했던 사실을 그대로 따라 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보안사 정보2과장으로 재직하다 대령으로 예편, 나중에 교원대 교수를 역임한 한용원의 회고록 「1980년 바보들의 행진」에 의하면, 전두환은 이미 10.26 사건 당일 밤 허화평 비서실장과 한용원 등에게 비밀리에 5.16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다.


■ 정승화, 전두환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

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 체제가 출범하자,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이제 선거도 끝나고 했으니 부정 축재자 명단이 작성됐으면 한번 보자”고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전두환은 정보부와 경찰이 갖고 있는 정보들이 신통치 않아서 시간이 걸린다면서 보고를 미뤘다.

이때는 이미 정승화 연행 및 제거에 대한 생각을 굳힌 상태, 전두환으로서는 부정 축재자 문제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1979년 11월 6일, 10.26 사건에 대한 전두환의 수사 중간발표 장면.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전두환이 자신의 존재를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뚜렷하게 각인시킨 10·26 사건 1차 수사 결과 발표일이 79년 11월 6일이었다. 그때 박정희 시해 사건은 김재규의 단독 우발 범행이고, 정승화 참모총장은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전두환은 이미 밝힌 상태였다.

전두환이 자신의 공식 발표를 스스로 뒤집고 정승화 체포를 시도할 정도로, 갈등이 깊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다.

부정 축재자 재산몰수 문제를 정승화에게 건의한 직후, 전두환은 다시 정승화를 찾아가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외무부에 여권 신청을 했는데 부정 축재자 조사를 눈치채고 해외로 도피하려는 것 같다”며 이후락의 여권 발급을 보류토록 조치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이후락은 인도에서 개최되는 세계불교신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상의 끝에 이후락이 출국할 수 있도록 조치, 전두환의 결정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그런데 이후락은 출국한 이후, 귀국을 미루면서 해외에 장기 체류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전두환의 합수부는 이후락 출국 문제가 10.26 당시 청와대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 중장 처리 문제와 함께 12.12 때 정승화를 연행한 주요 동기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이재전 중장은 일선 지휘관 시절, 장군들 모임에 보안사 요원 참석을 금지했다. 게다가 보안사가 전투부대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보안사 기구 축소 및 개편 건의를 박정희에게 올렸었다. 그러니 보안사 요원들과 전두환에게는 극심한 증오의 대상이었던 상황.

그런데 합수부가 10.26 사건 관련 직무유기로 구속했던 이재전 중장을, 정승화는 징계위원회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냥 예편 조치만으로 풀어줘 버렸다. 이 부분 역시, 전두환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 장태완 장군 수경사령관 임명을 비롯, 군 인사에 대한 하나회의 반발

정승화 총장은 79년 11월, 전격적으로 일부 군 인사를 단행했다.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이희성 참모차장을 임명하고 후임 참모차장에는 윤성민 3군단장을, 3군단장에는 수경사령관 전성각 장군을 승진, 발령했다.

그리고 후임 수경사령관에 교육참모부 차장으로 있던 장태완 소장을 임명했다. 그런데 이 인사를 두고 군 내부에서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소장 계급은 육사 8기생 일부와 9기, 10기, 11기, 12기생과 함께 육군종합학교 출신 등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대부분 소장 진급 연도가 비슷해서, 치열한 경쟁 때문에 중장으로 승진할 기회가 별로 없는 상황.

그런데 고참 소장으로 계급정년이 다 된 전성각 장군을 중장으로 승진시켜서 군단장으로 기용하자, 정규 육사 첫 기수이자 전두환 동기인 11기 이하는 중장 승진이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여기에 중앙정보부장 물망에 올랐던 유학성 장군의 불만이 더해졌다.

정승화가 새로 발탁한 장군들은 이희성을 빼면 모두 한결같이, 하나회 정치장교들에게 비타협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에게 밀려서 하나회 회원들 진급이 불가능? 이는 군 내부에서 하나회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거나 몰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참고로 이희성은 육사 8기로, 정승화가 합수부에 의해 구속된 직후 후임 계엄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을 맡았다. 이후 대장으로 예편한 뒤 교통부장관과 주택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5.18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광주학살을 지휘했던 책임 때문에 훗날 재판에서 7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정승화의 박정희 시해사건 연루 문제와 ‘군 혁신’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자신들 진급 문제인 ‘밥그릇 싸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군 인사 배경에 대한 정승화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 10.26 사건 3, 4일 지난 뒤였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께서 중앙정보부장으로 군에서 한 사람을 추천하라신다”며 나의 의견을 물었다.

( 중략 )

유학성 군수차관보와 이희성 참모차장을 놓고 고려하게 됐다. 유학성 장군이 어떻겠냐고 했더니 장관은 그런 중책을 맡기기에 부적당한 사람이라고 반대했다. 나도 유학성 장군이 권력에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라고 보았으나 장관 의견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희성 차장을 추천하게 되었다.

참모차장 후임에는 수도경비사령관 전성각 장군을 중장으로 승진시켜 임명했다. 계급정년이 다 되어가는 그에 대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특별히 군단장 기용을 부탁했었고, 손색없는 야전 군인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후임 수경사령관으로 장태완 소장을 발탁한 것은 그가 준장 시절 수경사 참모장직을 경험했고, 일선 사단장으로서 아주 훌륭하게 능력을 발휘했던 점을 고려했다. 또 솔직담백하고 용기 있는 순수 군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 소장은 장태완 소장이 수경사령관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며 재고해 주도록 요청했다. ( 「12.12」. 폴리티쿠스. 47 ~ 48 페이지 )

[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장태완 수경사령관 역을 연기한 배우 정우성 ]

전두환이 장태완 수경사령관 임명을 반대한 것은 과거의 악연 때문이었다.

장태완이 준장 시절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직후, 수경사 방공포 진지 공사 현장을 둘러보다 공사 태만에 대해 방공포 대대장이던 중령계급 장교를 엄하게 질책했다. 그런데 그 중령이 장태완에게 심하게 대들었다.

육사 15기로 하나회 핵심 중 하나였고, 전두환의 아랫 동서였기 때문에 자신의 배경만 믿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장태완의 상관이었던 진종채 수경사령관은 적당히 조치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장태완 참모장은 자신과 그 중령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해당 중령은 영창에 보내졌다가 전역 조치가 이뤄졌다. 그러니 전두환으로서는 장태완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외에도 정승화와 전두환은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된 비자금 9억 원을 전두환이 마음대로 처리했던 문제, 서울 YWCA 위장결혼식 사건 관련자 고문 문제, 합수부의 정보 독점 문제 등 여러 사안으로 대립했다.


■ 12.12 군사쿠데타 3일 전, 정승화의 전두환 교체 건의

12.12 군사쿠데타 3일 전인 79년 12월 9일. 마침 일요일이었던 그날 오전,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정승화 계엄사령관, 김종환 합참의장,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김종곤 해군참모총장 등이 태릉 육사 골프장에서 골프 회동을 했다.

코스 중간쯤인 어느 시점, 같은 골프 조였던 노재현과 정승화가 둘만 있게 됐을 때 조심스럽게 정승화가 말을 꺼냈다.

“합수부장 월권이 너무 심해서 타 부처와 마찰이 잦아 문제입니다. 이번에 바꾸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노재현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스치고 잠시 침묵한 뒤 답변이 이어졌다.

“나도 전두환의 월권행위가 지나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원래 그런 사람 아닙니까. 달래가며 더 지켜보다가 정 안 되겠으면 그때 가서 바꿉시다”

계엄사령부 직속인 합수부장 인사권은 계엄사령관에게 있었다. 그러나 보안사령관 인사권은 국방부장관의 소관이었다.

그러니 전두환을 경질시키기 위해서는 노재현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런데 노재현의 반응이 그렇자, 정승화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승화는 원래 김재규의 1심 선고 예정일인 12월 15일이 지나면 전두환을 경질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재판 끝나고 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다음 해 봄쯤, 군 내부에서 여론이 좋지 않은 정치장교들을 숙군 조치하면서 전두환 경질 문제도 그때 함께 처리하겠다는 것이 정승화의 바뀐 생각이었다.

이 대목에서 ‘계엄사령부 합수본부장을 전두환이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필자의 분석이 지니는 타당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아무 의심 없이 계엄법에 의해 전두환이 합수본부장에 취임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아왔다.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 첫 장면에도 그 내용이 등장했다.

그러나 정승화가 전두환의 ‘경질’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계엄법에 그런 내용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법에 규정된 당연직이라면, 임의로 경질할 권한이 계엄사령관에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승화의 판단 착오로 인한 전두환 합수본부장 임명과 뒤늦은 교체 결심, 그 잘못된 선택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고 말았다. 다시 한번 통탄스러운 대목이다.


■ 근거가 희박한 전두환 동해안 경비사령관 방출설

영화 ‘서울의 봄’에는 잘못 알려진 또 다른 부분이 있다.

정승화가 전두환을 합수본부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방출하려 했던 계획, 그리고 이를 보안사 도청을 통해 전두환이 알게 된 것이 12.12쿠데타의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내용이다.

[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

그러나 정승화는 노재현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보안사령관 경질 문제를 말한 적이 없었다. 전두환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는 노재현이 경질 건의를 받아들인 후에나 생각할 문제이지, 차후 전두환의 보직을 어떤 자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승화의 증언이다.

따라서 ‘전두환 동해안 경비사령관 방출설’은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말 그대로의 ‘설’일 뿐이었다.

당시 동해안 경비사령부는 예하 병력이 1개 여단 규모에 불과한 한직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실질적인 권한도 별로 없어서, 전두환 같은 정치적 야심이 있는 장성을 격리시키는데는 안성마춤이라는 것이 ‘방출설’을 낳게 된 근거였던 것.

전두환 역시 1988년 12월 31일 국회 청문회 증언에서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본인에 대한 전보 발령설이 이 사건( 12.12쿠데타 )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있는 모양이지만 본인은 그 당시에는 그와 같은 일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정승화가 노재현에게 전두환 경질 건의를 최초로 꺼낸 시점은 12월 9일 골프 회동, 그러나 전두환은 이미 그 이전부터 정승화 연행과 12.12쿠데타를 위한 사전 포석을 치밀하게 깔고 있었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방문, 김장에 보태쓰라고 100만 원을 전달하면서 “계엄 업무 수행으로 수고가 많은 장태완 사령관을 모시고 전두환 사령관이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한 시점이 12월 5일.

이는 거사 당일인 12월 12일 연희동 요정으로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등을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사탕발림 미끼였다.

또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를 서울로 외출 나오게 해서 정승화 연행 조사 계획을 의논했던 것이 노재현 – 정승화 골프 회동일 하루 전인 12월 8일.

마찬가지로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을 전두환이 자신의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서 만난 것이 12월 9일 오전이었다.

정리하면 12월 9일 정승화가 노재현에게 전두환 경질을 건의했던 내용이 알려져서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감행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다.

전두환의 거취 문제와는 상관없이,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정권 탈취를 위한 쿠데타를 이미 그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이 숨겨졌던,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 세계 7대 보안업체 ‘웨어밸리’ 대표는 45년 전 12월 12일 경복궁에 있었다

운명의 79년 12월 12일.

저녁 6시가 되자 서울 보안사령부 정문 앞에 3성 장군 별판을 단 지프가 멈춰 섰다. 차 안에 있는 인물은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이때 정문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수행 부관인 중위 계급 장교가 대기하고 있었다.

글 서두에서 언급한, 오늘날 세계 7대 보안업체로 일컬어지는 ‘웨어밸리’의 손삼수 대표가 바로 그 전두환 수행 부관.

손삼수는 육사 33기로 전두환이 1사단장이던 시절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사단장 부관으로 전두환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보안사령관 수행 부관을 거쳐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수행비서와 부속실장을 지냈다.

그런 그가 12.12 군사쿠데타라는 어마어마한 드라마에 등장할 조연 배우들을, 이제 막 반란 근거지에서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손삼수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으로부터 “정문에 나가 있다가 장군들이 들어오면 30경비단 위치를 알려주고 곧바로 단장실로 모시라”는 지시를 받은 상황이었다.

허화평이 안내를 지시한 장성은 차규헌 중장 외에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등등 이었다.

12월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들’이 내준 숙제

이 글을 쓰기 위해 한참 동안 글에 대한 구상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무렵,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당연히 기쁜 마음과 함께 속으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갑자기 10년 전 기억으로 잠시 고통스러웠다.

2014년, ‘소년이 온다’ 출판 소식을 듣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귀가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정작 몇 페이지 책장을 넘기지도 못하고 책을 덮고야 말았다.

첫 장면에서 등장했던 상무관…

세월의 먼지로 더께더께 덮어왔던, 내 영혼의 나이테 어느 지점엔가 깊숙이 저장되어 있던 그 강렬한 기억들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 5.18 당시 사망자들을 모셨던 광주 상무관. 출처 : 5.18기념재단 ]

소설 속 주인공 동호처럼, 광주가 고향인 필자 역시 중학교 3학년 때 5.18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경험했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까지 대거 참가했던 80년 5월 16일 밤의 횃불 가두시위.

공수부대가 투입된 직후인 5월 18일. 하굣길에 마침 같은 방향이라 친구 한 명과 함께 택시를 태워줬던 젊은 여자 한문 선생님. 절대 공수부대 근처에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라고 신신당부하던 그 선생님 얼굴에 스치던 공포와 불안한 표정.

그리고 5월 21일, 살고 있던 집 근처 산수동 오거리에서 겁도 없이 올라탔던 시민군 트럭. 법원과 조선대를 거쳐 멀리 증심사까지 한참을 돌다가 다시 도청 근처에 도달했을 무렵, 요란하게 울리던 총소리.

바로 그때 난생처음 보았던, 멀리서 총에 맞아 사람이 죽어가던 모습.

총격을 피해서 마치 새 떼처럼 화급히 흩어져 골목 골목으로 피하던 사람들.

항쟁이 끝나고 시체들이 보관됐던 상무관. 그 담벼락, 하얀 종이 위에 적혀있던 이름들. 처음에는 그 이름들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가, 그것이 사망자 명단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목젖을 콱 조이며 차오르던 슬픔과 눈물.

그 모든 기억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10년 전 그 시점에는, 한동안 ‘소년이 온다’를 읽을 수 없었다.

[ 상무관, 5.18 당시 희생자 유가족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소년이 온다’ 첫 장 ‘어린 새’에 나오는 이 질문은, 중고교 시절 필자에게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대한민국 군인들이 아무 죄 없는 자기 나라 국민을 그토록 무참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을 풀기 위해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1학년 때부터 전남대 1, 2학년 학생들이 본다는 사회과학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던 같은 반 친구를 통해서는 5.18 당시의 ‘투사회보’나 학생운동 관련 문건들을 입수해서 읽기 시작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리 위험할 것도 없는 수준의 내용들이었지만, 그 시절의 필자는 ‘스스로 의식화된(?) 문제학생’의 길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수 끝에 들어간 대학 시절 역시, 내내 5.18을 화두 삼아 온몸으로 부딪치던 시기였다.

88년 ‘전대협 산하 서울지역 총학생회 연합 서부지구 의장’이라는 제법 거창한 직함으로, 그해 연말 통일민주당 당사 점거 농성에 들어가고 김영삼 총재를 면담했을 때였다.

[ 1988년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 발간한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자료집 표지.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 1988년 11월 5일, 당시 전대협과 재야진영이 개최했던 광주학살·5공비리 주범 전두환, 이순자 구속처벌을 위한 궐기대회 소식지.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국회에서 5.18 청문회를 개최하고 이를 TV로 생중계하라, 5.18 발포 책임자를 처벌하고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라’ 등등 요구 조건들을 내걸고 그것이 관철됐을 때, 이제는 학생운동이나 재야가 아니라 국회에서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5.18 진상규명 작업은 지지부진,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상황이 지속됐다.

그래서 95년 지방선거에서 만 나이 29세로 최연소 경기도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2004년 총선에 도전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오죽하면 ‘탄돌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면서 많은 선후배, 동기들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당시, 비록 나는 선거에 실패했지만 국회가 잘 역할을 해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2005년, 성남시 중원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다시 또 도전했을 때 그 믿음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재선 국회의원을 상대로 싸워야 했던 상황, 열린우리당 공천 면접 심사를 보러 갔을 때 일이다.

지금은 ‘작가’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는,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쳐 재선 국회의원이었던 유 모 의원이 공천 심사위원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 그때까지 전혀 친분이 없던 여성 국회의원 한 사람이 함께 공천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전까지 민주화 운동은 물론이고 사회단체 경험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지역구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당선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공천 심사 서류 자기소개서에, 5.18이후 삶에 대한 간단한 회고와 함께 ‘국회의원이 되면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일에 헌신하고자 함’이라고 도전 취지를 적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순간 그 여성 국회의원이 물었다.

“국회의원이 되면 5.18 진상규명을 한다구요? 그거 너무 과격한 얘기 아니예요? 그런 일은 운동권 단체나 할 일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눈자위가 꿈틀하면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공천심사 받는 답시고, 잘 보이겠다는 마음에 또박또박 공손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모멸감이 느껴졌다. ( 물론 그 모멸감은 공천 심사위원의 성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뭐요! 방금 뭐라고 했소! 5.18 진상규명이 과격? 운동권 단체나 할 일?”이라는 고함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지, 유 모 의원이 웃으면서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학번 차이가 좀 나는지라 직접 인연은 없었지만, 그래도 학생운동 선배로서 후배를 감싸주려 했던 것일까?

아무튼 덕분에 공천 심사장에서 심사위원과 대판 싸우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그날 이후 국회를 통한 5.18 진상규명이 정말 가능할까? 조금씩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당 계열 정당에 저런 국회의원이 있다니.

[ 5.18 당시 희생자 유가족 모습.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그러나 세월 지나고 보니, 꼭 그 심사위원만 탓할 일도 아니었다. 올해로 벌써 44년.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다.

심지어 국회에서 관련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4년 동안 무려 5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한 정부 공식기구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는, 온갖 왜곡된 사실을 담은 500페이지 분량의 ‘군경 피해 보고서’를 남겼다.

‘계엄군도 피해자’라는 취지의 그 개별 보고서가 버젓이 공식적으로 제출되는 상황, 그것이 지금 현실이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밀도 높은 감정 때문에 작업실에 갔다가 하루에 세 줄 이상 쓰지 못하고 돌아온 날들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집필 기간 1년 반 동안 한 문장 쓰고 한나절을 울기만 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다시 한 문장을 쓰곤 했다는…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하기 전, 동호의 실제 주인공인 고 문재학 군의 형에게 이야기를 책으로 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다.

5.18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초·중·고교생은 대략 3백여 명. 그중 문재학 열사를 포함해 도청에서 숨진 희생자 17명 가운데 7명이 10대였다. ( 이들 이야기를 묶은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이라는 책이 2023년 2월에 출간됐다 )

그때 한강 작가에게 고 문재학 군 형은 이렇게 말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그러나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던 날, 5.18을 ‘오쉿팔’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면서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을 폄훼하는 어떤 ‘작가’ 소식도 동시에 알려졌다.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거침없이 하는 인물을, 윤석열 대통령은 무려 ‘진실화해위원장’이라는 자리에 임명했다. 그리고 스스로 약속했던, 5.18정신 헌법 전문 수록 문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오리발 하세월이다.

이 또한 광주와 5.18, 그리고 ‘동호들’에 대한 심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헌법 전문 수록, 전두환 비자금 회수 등등 5.18 희생자인 ‘동호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내준 숙제는 그 어느 것 하나 지금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 80년 5월 14~16일, ‘민족민주화 대성회’가 열렸던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 ]

한강 작가는 여전히 ‘살아남은 자’의 부채 의식을 지닌 사람들 목소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80년 5월의 ‘동호들’이 내준 숙제, 그것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장례식인 삶 속에 머물러 있다.


정소앙 발행인
키워드 : 12.12쿠데타 | 5.18 | 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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