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10월 27일, 박정희 사망소식을 알린 당시 기사. 출처 : 동아일보 ] |
점과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면 시대 흐름이 되고 역사가 된다. 역사 속 거대사건들은 어느 날 갑자기 기존 흐름과 전혀 무관하게, 돌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 역사적 사건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전후 맥락을 통해 접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과정을 통해 전체 윤곽이 드러나고 입체적인 해석이 가능해질 때, 마침내 가려졌던 가장 깊숙한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 국군( 國軍 )이 자국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참상이 벌어진 80년 5월 역시 그 전후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사건은 당연히 79년 10.26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고, 이후 국가권력을 쿠데타로 탈취할 직접적인 기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유행하고 있는 타임슬립 영화나 드라마처럼, 이제부터 잠시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 역사 속 숨은그림찾기에 나서보기로 한다.
( 원래는 예고한 바와 같이 80년 5월 공수부대의 잔인한 민간인 학살 부분을 5.18 특집기사 2회차에서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시대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5.18 직전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함을 말씀드린다 )
■ 유신정권 종말 징후 1 - 김형욱 사건
박정희 정권 기간, 역대 중앙정보부장 중 최장수 부장이 바로 김형욱이었다. ‘남산 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963년부터 69년까지 6년 이상을 중정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 기간에 여러 민주화 인사나 박정희의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다.
작곡가 윤이상 등이 대남 적화 공작에 앞장섰다는 구실로 교민과 유학생들을 강제 연행하고 고문, 서독과 프랑스 정부와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었던 ‘동백림( 동 베를린 ) 간첩단 조작사건’.
그리고 사상 초유의 사법살인 사례인 ‘인혁당( 인민혁명당 ) 사건’ 등이 바로 김형욱이 중정 부장 시절 저질렀던 대표적인 조작·탄압 사례들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심복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충성을 다했던 김형욱은 1969년 이후 박정희에 의해 토사구팽을 당한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목표로 감행했던 ‘3선 개헌안’에 대한 찬성 조건으로, 김형욱 중정부장 해임 요구가 정치권에서 제기됐던 것.
수많은 악행과 거친 언행으로 야당뿐만 아니라 당시 여당 내에서도 적이 많았던 김형욱은 결국 중정부장에서 해임됐다. 그리고 1972년 유신 선포 직후에는 그나마 유지됐던 국회의원직 마저 박탈당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박정희를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던 김형욱은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며 미국으로 도피 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회유, 다시 귀국시키기 위해 김종필, 정일권 등 고위급 측근 인사들을 보냈으나 모두 성과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 2020년 개봉영화 ‘남산의 부장들’ 포스터.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 실제 인물 김형욱. 배우 곽도원 분 )의 미국 의회 선서 장면 ] |
그러던 중 1977년에 미국 정치권을 강타한 ‘박동선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김형욱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거침없이 폭로했다. 더불어 박정희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내용으로 실은 회고록을 일본에서 출판했다.
결국 충복에서 ‘눈에 가시’가 된 김형욱을 제거하기 위해 은밀한 작전이 펼쳐졌다.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권총으로 사살되기 직전인 1979년 10월 7일, 한국에서 파견된 정체불명의 공작원들에 의해 김형욱은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된 뒤 마치 연기처럼 행방이 사라졌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형욱의 행방은 묘연한 채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정희가 가장 가까운 충복이자 측근이었던 김형욱을 배신하고 토사구팽, 그로 인해 부끄러운 치부와 부정부패 실상이 국내외에 적나라하게 폭로됐던 상황이야말로 유신정권 종말의 첫 번째 징후라고 할 수 있다.
■ 유신정권 종말 징후 2 - 카터 행정부와의 韓-美 갈등
1977년,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미 카터는 ‘도덕 정치’와 ‘인권 외교’를 표방하면서 박정희 정권 18년 장기 집권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유신독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민주화 진영에 대한 탄압 수위를 갈수록 끌어 올렸다.
그러자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본격적으로 꺼내 들기 시작했다. 북한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배경이었던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비밀리에 ‘독자적 핵무기 개발’이라는 초강경 카드를 검토하면서 카터 행정부에 오히려 맞서기 시작했다.
이후 1979년에 카터가 한국을 직접 방문하면서, 한·미 정부 간 심각한 갈등 양상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카터가 박정희 정권이 제공했던 영빈관 숙소를 거부하고,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미 해병대 헬기를 타고 동두천 미군 기지로 이동해서 여장을 풀었던 것.
그리고 다음 날 국회 연설에서 카터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여러 번 강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박정희를 대놓고 자극했다.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사전에 미국으로부터 주한미군 철수 반대 입장을 거론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박정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철수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혼자서 무려 45분간이나 했다.
세계 최강국 미국 대통령 카터는 박정희 연설 내내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훗날 당시 정상회담에 대해 “그동안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회담 가운데 가장 불쾌한 회담”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과 미국 정부 관계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던 당시 상황, 이것 역시 박정희 정권 종말의 또 다른 징후였다고 볼 수 있다.
■ 유신정권 종말 징후 3 – YH사건, 김영삼 국회 제명과 부마항쟁
1979년 8월, 가발 수출 중소기업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187명이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당사로 집결했다. 근로조건과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던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이,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야당과 여론의 도움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워온 대표적인 야권 지도자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이들과 면담을 통해 함께 투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농성 3일째 되는 날 새벽 2시에 2000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경찰 병력을 투입, 신민당 당사 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고, 건물 옥상에서 여성 노동자 한 명이 추락사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해당 여성 노동자가 투신자살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 분노한 김영삼은 사건 직후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 도중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규탄,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
- 김영삼, 1979년 9월 12일, 뉴욕 타임스 인터뷰 中
[ 1979년 10월 4일, 당시 김영삼 의원 제명 관련기사. 출처 : 경향신문 ] |
그런데 박정희 정권과 여당인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는 김영삼의 기자회견 발언을 ‘사대주의’로 규정, 국회에서 김영삼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제출함과 동시에 국회의원직 제명을 추진했다.
분노한 신민당 의원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했지만 여당은 경찰력을 동원한 채 김영삼 제명안을 단독으로 날치기 처리, 끝내 의원직을 박탈하고야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는 신민당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의 의원직 총사퇴 결의로 이어졌고,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 중심으로 일어난 ‘부마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과 일반 시민들은 김영삼에 대한 탄압 중단과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점점 더 가속화됐다.
그런데 심각성을 파악한 박정희는 민심을 달래기는커녕,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공수부대를 투입,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마찬가지로 마산과 창원 일대에서도 위수령을 발동,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김재규에 의한 10.26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박정희 사망과 유신정권 종말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야 말았다.
■ 중앙정보부 VS 청와대 경호실, 김재규와 차지철 간의 갈등
박정희 정권 당시 대표적인 권력 기관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이었다. 검찰과 경찰도 나름 권력 기관으로 존재했지만, 당시 중정과 청와대 경호실이 휘둘렀던 힘과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양대 권력 기관이다 보니 중정과 경호실 사이 갈등과 신경전이 매우 심각했다. 과거 이후락 중정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 간 알력에 이어, 박정희 정권 말기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간의 갈등은 정권을 흔드는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재규는 육군 중장 출신으로 보안사령관, 건설부 장관, 중정부장 등 화려한 ‘정통코스’를 밟았지만, 차지철은 겨우 육군 중령으로 예편,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박정희가 전격적으로 경호실장에 발탁했던 것.
그러다 보니 김재규와 차지철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민주화 운동 및 야당 대응 등에 있어서 사사건건 노선이 엇갈렸다. 김재규가 대체로 온건한 대응을 주장한 반면, 차지철은 시종일관 강경노선만을 강조했다.
또한 김재규는 박정희의 심기에 거슬리는 말도 가끔 했지만, 차지철은 마치 입속의 혀처럼 처신하면서 박정희의 심기에 맞는 말만 했다. 결국 박정희는 갈수록 김재규를 멀리하고 차지철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점차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데다 군 경력도 별것 없던 차지철로부터 무시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자, 김재규의 증오와 분노는 뼈에 사무쳐 폭발 직전까지 이르게 됐다.
■ 10.26 사건 전모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 동석하여 저녁 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 사태는 체제 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관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시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 4·19 )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해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차 실장은 이 말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 言 )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읍니다. 박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하여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 김재규 ‘항소이유 보충서’ 中.
[ 10.26 사건 당시 부마사태에 대해 발포를 비롯한 강경 진압 입장이었던 박정희와 차지철. 출처 : KBS 영상 캡처 ] |
[ 10.26 사건 당일 ‘부마사태는 학생 데모가 아니라 민란’이라는 주장과 함께 온건책을 건의했던 김재규. 출처 : KBS 방송 캡처 ] |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유신정권이 종말을 고하던 그날은 비교적 맑은 날씨였다.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등을 궁정동 안가로 불러서 함께 연회를 진행하는 것이 당일 박정희의 일정이었다.
그런데 마치 박정희의 운명을 암시라도 하듯, 오전부터 이런저런 불길한 징조들이 있었다.
삽교천 완공 담수비를 제막할 때는 때마침 강하게 분 강풍에 천이 비석을 휘감아 버리는 바람에, 박정희가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겨도 천이 전혀 벗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진 송신소에서 점심 식사 장소인 도고 호텔로 헬기로 이동하여 도착할 무렵, 호텔 사육장에서 기르던 사슴들이 헬기가 내는 굉음과 강풍 때문에 놀라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새끼를 가진 암사슴 한 마리가 축사 기둥에 강하게 머리가 부딪쳐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괴변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당진 송신소는 대북 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보안시설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재규는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헬기에 박정희와 동승하지 못했다.
행사 참석을 위해 전화를 건 김재규를 향해, 차지철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정보부장이 서울을 비우냐며 자리를 지키라는 면박과 함께 김재규의 행사 참석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김재규는 중정 부하직원을 통해 박정희의 저녁 연회 준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섭외 대상 연예인은, 박정희의 큰딸 박근혜보다도 나이가 어린 당시 24세의 가수 심수봉과 22세 광고모델 신재순이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 건물 2층 연회장.
박정희 일행이 도착하자,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음식상 위에는 평소 박정희가 ‘서민 친화적’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즐겨 마시던 막걸리 대신, 양주 시바스 리갈이 올려져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사망 이후, 그게 대체 어떤 술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시바스 리갈이 불티나게 팔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런데 술잔이 오고 가는 와중에 신민당과 김영삼, 부마항쟁에 대해, 앞서 김재규 항소이유 보충서에 나온 의견충돌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신민당 놈들 비행 조서만 움켜쥐고 있으면 그만인가? 잡아들일 놈들은 딱딱 입건해야지!”라며 차지철에 이어 박정희가 면전에서 매섭게 면박을 주자, 김재규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박정희는 이를 무시하고 심수봉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자 심수봉이 기타를 치면서 ‘그때 그사람’과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그리고 다음 노래 부를 사람으로 차지철을 지명하자, 차지철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다음 순서로 신재순을 지명했다.
이후 7시 30분경,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온 김재규는 곧바로 중정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의전과장을 호출했다. 그러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박정희, 차지철에 대한 사살과 경호원 제거 계획을 알리면서 ‘이것은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에 들러 평소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 권총을 숨기고 다시 연회장을 향했다.
7시 38분, 김재규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신재순은 심수봉의 기타 반주에 맞춰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다.
7시 40분, 신재순이 노래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순간, 김재규는 노래를 끊으면서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라고 외치면서 권총을 꺼내 첫 발을 쐈다.
오른쪽 손목에 관통상을 당한 차지철이 당황한 채 손목을 움켜잡으며 “김부장, 왜 이래!”라고 외치자, 박정희도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김재규는 박정희를 향해 “야! 너도 죽어봐!”라고 소리 지르면서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10.26을 다룬 과거 드라마나 영상에는 김재규가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곤 했다. 그러나 1994년 12월, 10.26 사건 15년 만에 심수봉이 출판한 회고록 「사랑밖엔 난 몰라」에서 심수봉은 그런 말은 사실무근이라고 증언했다.
또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에게 들었다면서, 김재규가 심한 욕설과 함께 “야, 너두 죽어봐‘라는 말을 했다고 증언한 기사도 있다. ( 2015년 8월 26일 자 중앙일보 기사, ‘10·26 그날… 김재규, 박정희 향해 “야, 너두 죽어봐”’ )
아무튼 총을 맞은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서 곧바로 식탁에 얼굴을 묻었다.
김재규가 다시 또 박정희를 향해 세 번째 총알을 쏘려고 했으나, 권총이 격발불량을 일으켰다. 그러자 김재규는 밖으로 뛰쳐나가서 중정 부하직원이 가지고 있던 S&W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 권총을 가지고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때 화장실에 숨어있다 나온 차지철이 경호원을 찾으며 문 옆의 문갑을 들고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망설임 없이 차지철의 복부를 향해 총을 쏴서 그 자리에서 쓰러트렸다.
그리고 곧바로 박정희에게 다가가, 우측 관자놀이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결국 이 마지막 총알이 박정희 오른쪽 귀 바로 윗부분을 뚫고 들어가 뇌를 관통한 뒤, 왼쪽 광대뼈에서 멈췄다.
박정희가 자신의 62번째 생일 19일 전, 향년 61세로 생을 마치던 순간의 장면이었다.
이로써 공판 과정에서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던 김재규에 의해, 마치 철옹성 같았던 박정희 18년 장기독재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