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특집 ] ⑦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 3회, 대통령 되기까지 전두환의 국가권력 찬탈과정
검색 입력폼
사설·칼럼

[ 5.18 특집 ] ⑦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 3회, 대통령 되기까지 전두환의 국가권력 찬탈과정

- 억지 과장한 북한남침설
- 계엄확대, 국회해산 결정, 80년 5.17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장악 도구,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운 내란음모, 정부전복 기도 혐의
- 부총리에게 요구한 1백억 원, 최규하 대통령 하야 압박
-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과정

[ 80년 8월 20일 서울 장춘단 공원에서 열린 가수, 배우 등 연예인 동원 사회정화 궐기대회. 출처 :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
[한국시사경제저널]

생전에 전두환은 5.18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 1995년 내란 혐의 재판 당시 )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2003년 2월 SBS 인터뷰)

“광주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나는 광주 학살에 대해서 모른다”( 2019년 당시 정의당 부대표가 5․18 책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

그렇게 평생 단 한 번, 5.18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던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9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때 조선일보는 ‘[사설] 현대사 아픔과 갈등, 굴곡, 논란 안고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을 남겼다.

- 지금 우리 사회는 좌우 진영과 지역, 계층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이 대립과 갈등이 격화된 출발점이 바로 전 전 대통령 집권 과정이었다. 이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격동의 현대사 중심에 서있던 전 전 대통령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전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떠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5·18 희생자 중 한 사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했다. 이제는 어두웠던 역사의 기억도 그와 함께 떠나보냈으면 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우리 사회도 대립과 갈등, 상처를 넘어서는 길로 가기를 바랄 뿐이다. -

그러나 5‧18유족회 등 5월 단체들은 “학살자의 편안한 죽음에 분노한다”는 뜻을 밝혔다. 아무리 미움 대신 용서를 택하려 해도, 그 전제가 되는 ‘진심 어린 사과’가 빠졌기 때문이다.

용서와 비난, 그 어느 쪽을 선택하건 판단에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두에 옮긴 단편적인 몇 마디가 아닌, 속마음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통해 전두환의 생각 회로를 파악하기로 한다.

1차 자료는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시작된, 5·18 수사 당시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다.

조사와 신문조서 작성이 3회 이루어졌기에, 본지( 한국시사경제저널 ) 역시 3회에 걸쳐 신문조서 원문 전체를 그대로 싣기로 한다.


----------------------------------------------------------------------

피의자 신문조서( 제3회 ) 1995년 12월 10일 안양교도소

---------------------------------------------------------------------

■ 전두환, “기본적으로 대통령 될 생각 없었다”

문 : 피의자는 최규하 대통령이 10·26 사건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1980년 헌법개정, 1981년 상반기 선거, 1981년 6월 정권 이양이라는 정치발전 일정을 밝히고 질서정연한 가운데 합헌적 절차에 따라 평화적인 정부 이양의 선례를 수립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사실을 알고 있지요.

“알고 있습니다.”

문 : 그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피의자 등이 1979년 12월12일 정승화 총장을 강제 연행하여 내란 방조 혐의로 구속하고,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정승화 총장 계열 장성들을 강제 전역시킨 후 군내 핵심 요직을 차지하여 군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나요.

“그렇습니다.”

문 : 그후 피의자 등은 불필요한 계엄의 지속으로 학생들이나 국민들이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시위할 경우에 대비하여 1980년 2월18일 수도권 및 후방 주요 부대에 소요 및 폭동 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했나요.

“충정훈련이 시위진압 훈련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나 1980년 2월경에는 제가 충정훈련 강화를 지시할 입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문 : 그 무렵 비상시국 타개와 관련하여 3김 씨 불가론과 최규하 대통령 불가론을 자주 이야기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이야기를 한 사실이 없으며, 오히려 정승화 총장이 언론인 등에게 두 차례에 걸쳐 3김 씨 불가론을 이야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 피의자 주변에서는 피의자가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들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문 : 피의자는 결과적으로 대통령까지 되었는데, 집권에 뜻을 두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그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의자의 집권 과정에는 누가 핵심적으로 관여했나요.

“저의 밑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입니다.”

문 : 피의자의 집권 과정에 혹시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닌가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권정달 정보처장은 정보처장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을 뿐, 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문 : 권정달 정보처장이 보안사령관인 피의자를 보좌하면서 피의자의 집권을 위한 계획수립 등을 주도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 피의자의 집권 과정에서 허문도 씨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문 : 이학봉, 정도영, 허삼수, 권정달, 허화평 등이 피의자의 '대통령 만들기' 작업을 위해 수시로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등 12·12 주도세력과 모임을 가졌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들은 맡은 바 임무만을 충실히 했다고 생각하며, 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 K­공작계획, 중앙정보부장 겸직 스스로 자청한 전두환
[ 1980년 4월 16일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 장면. 출처 :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

문 : 10·26 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부에 기획관리실, 치안처, 법무처, 행정처와 함께 언론관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보도처가 설치되고, 문공부,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제기획원, 서울시청, 육.해.공군 등에서 파견된 50여명으로 보도 검열단이 구성되어

시울시청에서 신문, 방송, 잡지, 통신, 대학신문 등 모든 언론매체에 대한 보도검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와는 별도로 보안사 내에 이상재 준위를 팀장으로 한 언론대책반을 설치한 사실이 있는가요.

“언론대책반은 보안사의 처장급 중에서 누군가가 주도했던 것으로 기억되나, 그 구체적인 설치 목적이나 경위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론대책반 운영 과정에서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지휘관인 저의 책임입니다.”

문 : 소위 K­공작계획에 대해 들은 바 있는 가요.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문 : K­공작계획의 1단계가 1980년 3월 24일부터 시작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계획은 적어도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입안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계획은 언제 무슨 목적으로 수립된 것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문 : 세간에는 K­공작계획의 K가 King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그것은 유언비어라고 생각합니다.”

문 : K­공작계획은 그 목적을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함에 있다’라고 적시하고 있어, 피의자 등 신군부만이 혼란을 제어하고 안정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언론에 주입시켜 집권 기반을 다지겠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 : K­공작계획은 그 실시 시기, 내용, 구체적인 시행 과정 등에 비춰 볼 때, 언론을 통해 3김 씨 등 기성 정치인들간의 경쟁을 왜곡 선전하고, 북한의 남침 위협을 과장하며, 최규하 정부의 허약성을 강조하는 등 여론을 조작하여, 이른바 신군부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정지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의자는 1980년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했는데, 피의자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한 이유는.

“중앙정보부는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가지고 국가안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입니다. 그런 중요한 기관이 10·26 사건 이후 국민들로부터 범죄집단 시 되어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께서는 중앙정보부를 활성화하여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저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하게 됐던 것입니다.

문 : 피의자가 1980년 3월 말경 신현확 국무총리를 찾아가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일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문 : 그 자리에서 신 총리가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명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 점에 관해서는 자세히 기억할 수 없으나, 위에서 진술한 것과 같은 이유로 제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억지 과장한 북한남침설

문 : 피의자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겠다는 의사를 직접 밝힌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 피의자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토록 하는 문제는 누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했는가요.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가 알기로는 주영복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문 : 그 무렵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에게 “중앙정보부장에는 민간인을 임명해 정보계통을 군과 양립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말하면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은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문 : 피의자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된 것은 피의자에게 그 무렵부터 집권 의도가 생겼기 때문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문 : 1980년 5월 초순 경부터 학생들과 재야 민주인사들이 일제히 군부와 유신 관료 세력의 집권연장 음모를 규탄하며 피의자인 전두환의 퇴진 등을 요구하고, 정치권에서도 계엄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는 등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시국상황이 전개되었지요.

“본인으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 : 피의자는 그 당시 이러한 시국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요.

“솔직히 말씀드려 그 당시 시국 상황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져 가고, 특히 3김 씨 사이의 노골적 대립과 주도권 쟁탈전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문 : 그때 국가의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피의자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저는 최규하 대통령이 업무 수행을 잘하고 계셨기 때문에,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 : 그러면 피의자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었나요.

“저는 사심 없이 최규하 대통령이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전적으로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문 : 1980년 5월 초순경 김영선 당시 중앙정보부 2차장이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남침 위협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었다고 하면서 담당국장과 함께 보안사령부로 찾아와, 피의자와 보안사 참모들이 대책 회의를 한 일이 있었나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문 : 이러한 남침 위협 관련 첩보는 군의 자체 동향 분석 결과 과장된 정보임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 : 그러면 피의자는 당시 북한의 남침 위협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나요.

“저는 일본으로부터 입수된 정보 이외에도 다른 정보들에 의해 북한의 남침 위협이 심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문 : 사실은 남침 위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는 1980년 5월 12일 중앙정보부 국장으로 하여금 임시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남침 위협을 보고하도록 한 사실이 있는가요.

“북한의 남침 위협을 국무회의에 보고하도록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북한의 남침 위협이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문 : 피의자 등 신군부가 근거도 희박한 북괴 남침설을 강조한 것은, 정권 장악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된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등의 명분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닌가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 : 1980년 5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와 이를 진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병력 투입 준비 등으로 불안정한 국내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동 순방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당시 국내 정치 상황이 다급했던 것은 사실이나, 국제적인 기름 파동으로 기름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에, 경제 각료들의 건의에 따라 중동 순방을 강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혹시 중앙정보부에서 강력히 권유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 80년 5월 14일 최규하 대통령 쿠웨이트 한국 건설기업 방문. 출처 :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

문 : 당시는 민주화 시위로 국내 사정이 어수선하고 항간에는 군부 등장설이 파다하여 대통령으로서 어떤 결단이 필요한 시기여서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반대하는 견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등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하게 되었다는데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 : 1980년 5월 14일관 5월 15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의 35개 대학,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했지만, 이런 대규모 시위가 피의자 등 신군부 측의 정권 탈취 기도에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하에, 1980년 5월 15일 밤 대학생들이 시위를 자제하고 해산했다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요.

“예.”

문 :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던 1980년 5월16일 밤 청와대에서 심야 대책 회의가 열렸는데, 피의자도 그 회의에 참석했지요.

“예.”


■ 계엄확대, 국회해산 결정, 80년 5.17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문 : 피의자는 그 당시 어떠한 대책이나 의견을 제시했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이에 대해 어떤 지시나 조치를 했는가요.

“김종환 내무부 장관이 그동안의 시국 상황을 보고했고 최규하 대통령께서는 큰일이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요.

“지역계엄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여, 이것만으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학생 데모 등 집단 행동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으므로, 좀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교환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국무회의 의결이나 대통령의 재가도 있기 전인 5월14일 이미 계엄군 전면 투입 준비를 지시하여 곧 전국의 주요 대학과 기관 및 시설에 계엄군을 투입하기로 했다는데, 이러한 계엄군 전면 투입 준비계획은 어떤 경위로 수립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그것은 계엄사령관의 소관 사항이므로, 제가 관여할 성질의 일이 아닙니다.”

문 : 1980년 5월17일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부 장관 주재로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열렸나요.

“예.”

문 : 이러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주영복 장관이 독자적으로 소집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신군부 측의 요청에 따라 신군부가 계획한 계엄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등을 추진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 아닌가요.

“국내 사정이 다급하여 대통령이 해외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한 상황에서 주영복 장관이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유병현 당시 합참의장에 의하면, 주영복 장관이 외부 요청에 의하여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합니다. 실제로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요청한 결의 내용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그대로 결의된 사실에 비추어 보면, 피의자 등 신군부가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 소집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의 논의를 거쳐 군부의 집약된 의견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계엄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방안' 등은 어떤 경위로 수립되었으며, 그 수립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 의하면, 1980년 5월 초순경부터 비상계엄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다가 5월 10일경 학생시위가 심화되자, 피의자에게 시국 수습 방안으로 그와 같은 조치를 검토하여 보고했고, 피의자는 이를 승인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국회 해산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배경이나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할 수 없습니다.”

문 :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 후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전군 지휘관들이 모여 집약한 결론임을 특별히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국무회의에서 제안 설명을 하면서도 군부의 집약된 의견이라는 점을 강조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데 군부의 결의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요.

“사실이 아닙니다.”

문 : 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기구를 설치하거나 정치 활동을 규제하겠다고 한 것은, 결국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피의자가 실질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권까지 장악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는가요.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문 : 5월 17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열리는 시간에, 피의자는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김대중 등 소요 배후 조종 혐의자,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자들에 대한 연행. 조사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나요.

“예. 대통령뿐만 아니라 계엄사령관에게도 보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이런 보고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당시 누가 배석했는가요.

“최 대통령이 대상자 명단을 자세히 보시고 그중 몇 명은 제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이때 계엄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에 관해서는 보고하지 않았는가요.

“그 당시에는 보고한 적이 없습니다.

문 : 피의자는 1980년 5월1일 16시경 김 모 변호사를 대동하고 청와대에 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끝났는데 군은 현재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통령의 비상조치를 원하고 있다”면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해산, 5.16 직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유사한 국정자문협의체의 설치, 각급 학교 휴교 조치 등을 건의했으나,

최 대통령이 “그 같은 상황은 5.16 하나로 족하고 특히 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중단 사태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비상계엄 확대를 제외한 나머지 조치들은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을 대동했던 것만 기억날 뿐, 그 이외의 사항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 10.26 이후 계엄령, 중앙청 앞에 나타난 탱크.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

■ 노태우 수경사 병력 배치, 공포 분위기 속 임시 국무회의

문 : 주영복 국방부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5월 17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마친 다음, 신현확 국무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특별기구 설치 등의 시국 수습방안을 보고한 결과는 어떠했는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 1980년 5월 17일 21시 42분 비상계엄 전국 확대 안건을 심의하기 위한 제42회 임시 국무회의가 소집되었지요.

“예.”

문 : 그 당시 중앙청 정문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청 현관에서 국무회의장까지는 양쪽에 1m 간격으로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이런 조치는 어떤 경위로 이루어진 것인가요.

“병력 운영은 저의 소관 사항이 아니므로, 그 점은 잘 모릅니다.”

문 : 당시 중앙청에 배치된 군병력은 수경사 병력이었는데, 노태우 당시 수경사령관과 사전 협의를 했나요.

“저는 모릅니다.”

문 : 5월 17일 21시 42분부터 같은 날 21시 50분까지 8분간 중앙청 회의실에서 임시 국무회의가 열리는 동안 회의장 복도에까지 수경사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단순한 경비가 목적이었다면 중앙청 건물 외부에 배치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는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문 : 피의자 등 신군부 세력들은 중앙청 국무 회의장 안팎에 군병력을 배치, 위압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강제하여 결국 헌법기관인 국무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국무회의가 열릴 당시에는 이미 계엄 확대에 따를 전면적 병력 투입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일부 부대 병력은 이동까지 했는데, 국무회의 결과와 상관없이 병력 전면 투입을 강행할 방침이었는가요.

“당시에는 계엄 상황이어서 군이 24시간 비상 대기상태에 있었으므로 국무회의 결과와 상관없이 병력이 전면 투입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여하튼 병력 동원은 저의 소관 사항이 아닙니다.”


■ 전혀 법적 근거와 타당성 없었던 비상계엄

문 : 당시 제주도에는 군을 투입해야 할 만한 소요 사태나 사회질서 교란 사태가 없었는데도 굳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역계엄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여, 그것만으로는 당시의 긴박한 시국 상황을 수습하기에 한계가 있고, 전국계엄을 선포하여 계엄사령관에게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부여하여 시국을 수습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당시의 헌법, 계엄법, 계엄법 시행령에 의하면 비상계엄은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해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할 수 있는 것이고, 사회 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이라 함은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한 전투지역 또는 그 인접 지대로서 민심이 동요하고 치안이 혼란하여 정상적인 행정 또는 사법기관이 그 기능을 상실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 내용을 잘 모르겠습니다.”

문 : 10·26 사건 이후 북한으로부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조나 사회 내부로부터 국가안보를 위협할 정도의 혼란이 전혀 없었으며, 더욱이 유신 헌법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이 계속되거나 확대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 : 피의자 등은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과 동시에 모든 정치 활동의 중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포토록 했는데, 정치 활동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엄사에서 한 일이므로, 저는 잘 모릅니다.”

문 : 정치 활동 중지 방안은 어떤 경위로 최종 결정되었는가요.

“계엄업무는 국방부의 주무 부서와 계엄사에서 주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잘 모릅니다.”

문 : 포고령 10호의 핵심 내용인 모든 정치 활동의 중지 조치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는가요.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문 :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의하면 포고령의 형식적인 문안 작성은 계엄사령부 담당 부서에서 했지만, 포고령 10호의 정치 활동 금지 등 조치에 대해서는 합수본부로부터 지침을 받아 작성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문 : 왜 구정치인들을 일정 기간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생각했나요.

“저는 당시 시국이 시끄러운 이유가 3김 씨가 순리적인 정치 일정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권력을 잡을 욕심에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문 : 그 후 5공화국 헌법 부칙에 정치 활동 규제 근거를 마련하고 그에 따라 정치 활동 규제법을 제정하여 상당수 구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도 결국 5·17 계엄 확대에 따른 정치 활동 규제 조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구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은 부패한 구정치인들을 일정기간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 3김 씨 정치 탄압과 국회를 점령한 신군부 무장병력
[ 동교동 자택에 가택 연금 중인 생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

문 : 그 후 김대중 등 핵심 기성 정치인 등을 체포.구금 또는 연금하고, 포고령으로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시킨 것은, 피의자 등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고, 결국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이른바 집권 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구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킨 것은 그들이 정치적 욕심 때문에 사회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대중은 학생 소요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하게 되었고, 김종필은 구공화당 시절 부정부패의 대표적 인물로서 재산을 환수하게 된 것이며, 김영삼은 가택 연금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정권을 차지할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 :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 재야인사에 대한 구체적인 연행, 조사 계획은 어떤 경위로 수립되었는가요.

“이학봉이 책임자로 있는 합수부 수사단에서 수립한 것입니다.”

문 : 학생 시위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들에 대한 선정 작업은 어떤 경위로 했는가요.

“실무자들이 보안사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를 기초로 선정 작업을 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

문 : 피의자는 1980년 5월13일 20시경 보안사령관실에서 이학봉 대공처장, 권정달 정보처장과 함께 국기 문란자와 권력형 부정 축재자들을 선정한 사실이 있다는데, 그 선정 기준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요.

“실무자들이 보안사에서 존안하고 있는 인물 카드를 기준으로 선정한 후 저에게 보고하여 제가 승인한 것입니다.”

문 : 정치인 연행, 조사 계획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는가요.

“예,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한 후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았습니다.”

문 :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5월 20일 오전 9시 상도동 자택에서 5·17 조치를 강력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려 하자, M16 소총으로 무장한 수경사 병력이 그날 8시경 집 주위를 에워싸 김 총재를 가택 연금한 사실이 있는데, 김 총재의 가택 연금은 어떻게 결정된 것인가요.

“김영삼 총재가 그 당시 시국을 혼란스럽게 한 책임이 있기에 가택 연금을 한 것입니다.”

문 : 1980년 5월 18일 새벽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더불어 수도군단 예하 33사단 101연대 병력이 국회에 투입되어 국회를 점령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계엄사령부에서 한 일이므로,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문 : 국회를 점령한 병력이 국회의원의 국회 출입을 통제하고 5월 20일 10시에는 황낙주 의원 등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여 결국 제104회 임시국회가 개회조차 못하도록 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 사실은 신문보도를 통해 알고 있으나, 제 소관이 아니라 그 경위는 모릅니다.”

문 :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이 행정, 사법사무는 관장하도록 되어 있으나, 입법권은 여전히 국회 권한에 속하므로 포고령으로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시키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여 임시국회 소집을 무산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케 한 명백한 헌정 중단 조치라고 생각되는데요.

“역시 계엄사에서 한 일이므로 제가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 5.18 광주학살에 전혀 책임 없다는 전두환

문 : 피의자는 1980년 5월 18일 7공수여단 병력이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된 후, 계엄 확대와 김대중 공동의장 체포에 항의하는 광주시민,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그들의 공분과 저항을 유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소요 진압을 명분으로 11공수여단, 3공수여단, 20사단 병력이 순차적으로 투입되어 발포를 하는 등 무자비한 광주 재진입 작전이 감행됨으로써 수많은 시민들이 살해된 소위 광주사태를 알고 있지요.

“광주사태는 계엄사령부의 작전권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저희 합수부는 병력동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보안사령관이던 저는 작전 상황만을 파악하여 계엄사에 알려주었기에 그 내용만 알고 있을 뿐이며, 진압 과정에는 전혀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문 : 당시 피의자는 최규하 대통령과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최고 지휘부와 광주사태 대책 등을 협의했나요.

“저의 업무와 관계가 없으므로, 대통령 등 광주사태에 관해 협의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피의자나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과 상의하여 광주사태에 대한 진압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가요.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책임감이 투철한 분으로 2군 사령관 등 관계 지휘관과 참모들의 보좌를 받아서 결정하여 진압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문 : 광주에 처음 투입되었던 7공수여단 2개 대대 이외에 11공수여단, 3공수여단, 20사단이 추가 투입되었는데, 현지 지휘관인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으로부터 증파 요청을 받은 바 없음에도 위와 같이 병력이 추가 투입된 이유와 경위는 무엇인가요.

“계엄사에서 한 일이므로,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문 :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역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다가 차량 시위 등으로 밀리게 되자,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요.

“저는 그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저의 소관도 아니므로, 제가 어떤 조치를 취한 바는 없습니다.”

문 : 1980년 5월21일 새벽 4시 30분 계엄사령관실에서 계엄사 대책회의가 열려 ①계엄군을 광주 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 ②자위권 발동 ③1개 연대 추가 투입 ④전투력 공백 보전책으로 2개 훈련단 훈련동원 소집 ⑤폭도 소탕작전 5월23일 이후에 실시 ⑥경계 강화 조치를 결정했는데, 그 때 발포 방침이 결정된 것이 아닌가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문 : 1980년 5월 21일 9시경 광주에 내려갔던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피의자의 지시에 따라 광주사태 진압을 주도하면서, 계엄사령관을 만나 자위권 발동 또는 발포 명령에 대해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가요.

“저는 아는 바 없습니다.”

문 : 당시 피의자의 군부 내 입지로 보아 당연히 발포 명령 과정에 관여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가요.

“저는 발포 명령에 전혀 관여한 바 없습니다.”

문 : 1980년 5월 25일 8시경 전남도청에서 발생한 독침 사건과 5월 23일 서울역 앞에서 체포된 남파간첩 사건은 시위대에 내부 소란을 일으키고 광주사태가 북한 간첩 등 불순분자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처럼 외부에 널리 알리기 위해 피의자 등이 주도하여 계엄 당국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제 기억으로는 위 독침 사건과 간첩 사건은 사실대로 있었던 사건이며, 전혀 조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문 : 1980년 5월 25일 피의자의 권유에 따라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대통령은 재진입 작전시 수백 명의 사상자가 예상된다는 보고를 듣고 재진입 작전에 명백히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데, 진입 작전 전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는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문 :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등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사태 기간 동안 피의자가 광주 현지를 방문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그 기간 동안에 광주에 간 일이 전혀 없습니다.”

문 :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현지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은 자신들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현지에 상주한 최례섭 보안사 기획처장과 홍성율 제1군단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받은 피의자와 노태우 수경사령관, 수시로 광주에 내려간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이른바 신군부 실력자들이 대책을 협의하여 발포 명령을 하는 등 진압부대를 직접 지휘함으로써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31사단장 정웅은 진압 과정에 잘못을 범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허위 주장을 하는 것이지,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 피의자 등 신군부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국민들의 강력한 정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비상계엄 확대와 김대중 등 민주인사들의 연행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이는 학생, 시민 등에 대하여 진압봉 및 대검을 사용하고 발포하는 등의 도발적인 강경 진압으로 무장 항쟁을 유도한 다음, 진압 명목으로 무차별 발포하여 살상하는 등 내란을 범하고, 내란목적 살인을 저질렀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광주사태 문제는 기본적으로 계엄사의 문제이지, 보안사나 합수부의 업무와는 무관합니다.”
[ 80년 5월 31일 전두환 상임위원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자문위원단 접견 장면. 출처 :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

■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장악 도구,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계획은 피의자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핵심 참모인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이학봉 등 4명이 주도하여 수립했나요.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계획은 위 4명이 주도하여 수립한 것이 아니라, 저와 보안사 참모장을 비롯한 참모진 모두가 관여하여 만든 것입니다.”

문 : 그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한 이유 및 경위는 어떤가요.

“제가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즉 국보위를 설치하게 된 배경을 설명드리겠습니다. 1979년 3월 제가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처음 을지연습을 해보니까, 전쟁이 발발하여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우리 군의 작전 업무에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점이란, 원래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이 모든 군사 업무와 입법, 행정, 사법 등 3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군사작전 업무만 해도 계엄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업무량이 벅찬데 거기다가 입법, 행정, 사법 업무까지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업무 모두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밖에 될 수 없었습니다. 특히 6.25나 5.16 때와 달리 요즘은 국력과 경제규모가 방대해졌는데, 실정을 잘 모르는 군인들이 각 행정부처에 파견되어 복잡한 행정업무까지 관여하다가는 경제를 비롯한 국가 기능이 마비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은 군사작전 업무에만 전념하고 행정부는 행정 관료들이 업무에 전념하되, 계엄법의 정신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대통령 직속 자문, 보좌기관으로서 일종의 비상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부의 전문 관료와 군 장교를 함께 근무하게 함으로써 업무가 유기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보안사 참모진에게 그 방안을 연구, 검토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계엄 하이던 당시 상황에서 위와 같은 비상 기구의 설치. 운영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그 기회에 위와 같이 연구된 방안을 실천에 옮기게 됐던 것입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에 관해 대통령의 사전 재가를 받았나요.

“물론입니다. 대통령에게 저의 생각을 보고하자, 대통령도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문 :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인 피의자가 대통령에게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에 관하여 건의할 권한이 있는가요.

“당시 저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건의한 것입니다.”


■ 국보위를 통해 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5.16 이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어떻게 다른가요.

“5.16 이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행정부 기능만이 아니라 법률 제정 기능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단지 정책을 건의할 수 있는 기능밖에 없었으므로, 국가재건최고회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문 : 결국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계엄령 하에서 행정부의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었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문 :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수반인 행정부를 군부에서 기술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신군부 측에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를 위해 피의자는 신군부 세력의 핵심이었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등과 사전에 협의한 사실이 있나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문 : 1980년 3월 말경 보안사 팀이 정권 장악에 뜻을 두고 집권계획 연구에 착수하여, 같은 해 4월 말경 비상권력기구로서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방안과 그 위원 인선 등의 준비를 완료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 : 국보위 비서실장의 진술에 의하면,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당초 계엄 확대와 동시에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권력기구로 계획되었는데,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긴급조치 발동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설치를 반대하자, 그 후 합법적인 외관을 갖추기 위해 대통령령에 근거한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최광수 비서실장의 진술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상임위원장에 임명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한 것입니다. 그때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그만 두었습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존속하는 동안, 의장인 최규하 대통령이 직접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전체회의를 주재한 것은 발족하던 날을 포함해 두 번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로 설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장인 대통령이 두 번밖에 회의를 주재하지 않았던 것은 상임위원장인 피의자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제가 상임위원장의 자격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운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법적으로는 대통령령에 의한 대통령의 자문, 보좌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을 강력히 조정, 통제하면서 국정 전반을 장악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상임위원장인 피의자가 사실상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닌가요.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정책 결정권이 없습니다. 다만 대통령에게 정책을 건의하여 대통령이 결정, 시행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의 어디를 보아도 입법 기능은 커녕 행정 기능조차 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숙정, 사회악사범 일소, 괴외금지 등 행정과 입법 기능을 수반해야 하는 조치들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에게 위와 같은 정책을 건의하여 각 부처별로 시행한 것입니다.”


■ 개헌까지 주도한 국보위

문 : 자문기구 내지 보좌기관에 불과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대통령 내지 행정부 소관사항인 위와 같은 조치들을 입안하여 집행한 것은 월권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초법적인 조치이므로 그 자체가 국헌문란 행위로 보이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 이른바 신군부의 실세이고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출범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허삼수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도 1988년 10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5.16 후 설치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비슷한 혁명위원회의 성격이 있었다고 자인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그것은 허삼수가 그 내용을 모르고 잘못 말한 것입니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행정 및 입법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단지 정책 자문, 보좌기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문 : 피의자는 1980년 6월 말경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법사분과위원들을 동원하여 개헌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문 : 위와 같이 지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 대통령께서 그 무렵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정부 내에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헌법연구회가 있기는 하지만, 제가 헌법개정에도 관심을 가지고 개헌에 관한 의견을 건의해 달라고 하여 지시한 것입니다.”

문 :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과 박철언, 우병규 법사분과위원이 주도하여 같은 해 7월 중순 경까지 개헌안 시안을 만들도록 하였나요.

“예,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직후에 법사분과위원들로 하여금 정부의 헌법개정 심의위원회와 별도로 은밀히 헌법개정 작업을 추진한 것은 결국 집권을 염두에 두고 다음 공화국의 헌정구도를 그려보고자 한 것이 아닌가요.

“앞서 진술한 대로 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연구한 것입니다.”

문 : 피의자, 노태우 수경사령관, 보안사의 정도영 보안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의 이종찬 총무국장, 허문도 비서실장 등이

1980년 7월15일 10시경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대통령 선출 방법, 대통령 임기, 국회의원 선거구제 등 헌법개정안, 정치일정 단축 방안,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문제 등에 대해 토의를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 대통령 선출 방법과 관련하여 당시 국민적 합의가 직선제였고, 대부분의 법사위원들도 직선제를 선호하고 있었다는데,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법사분과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헌법개정 작업의 진행 상황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한 일이 있는가요.

“다른 일로 대통령께 보고를 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진행 상황을 가끔 보고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 5공화국 헌법에서,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데 대한 헌법적 근거를 마련한 이유는,

포고령에 의한 정치활동 중지 조치, 군 병력에 의한 국회 점령과 국회의원의 국회 등원 저지,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등 이른바 3김 씨의 체포.구속.연금 등 주요 정치인 제거 조치로 국회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고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 활동이 규제된 헌정중단 상황을 헌법적으로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요.

“저로서는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문 : 피의자가 1980년 8월 중순 우병규, 박철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분과위원들에게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 임기 7년을 관철하도록 지시하고, 이용훈 법제처장으로 하여금 이를 반영시키도록 하는 등 사실상 헌법개정 작업을 주도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헌법개정 작업을 주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신헌법의 대통령 임기와 관련하여 임기가 6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너무 짧은 것 같으니 단임제로 하되 7년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전달한 바는 있습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운 내란음모, 정부 전복 기도 혐의
[ 망월동 묘역 방문, 추도사 도중 오열하는 김대중 전대통령.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

문 : 합수부에서 1980년 5월 22일 김대중이 정부 전복을 기도하고 학생소요를 배후 조종했다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 사실이 있지요.

“예.”

문 : 김대중에 대한 한민통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범죄인지 후 7년 동안이나 수사를 하지 않았던 부분이고, 1980년 2월29일 단행된 사면, 복권 이전의 일이므로 사실상 사면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건인데 새삼스럽게 수사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합수부 수사 관계자로부터 보고를 듣기로는 김대중 씨의 한민통 관련 부분은 7년 전에 중앙정보부에서 정보를 입수하고도 수사에 착수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보류하고 있던 부분인데, 어차피 계엄령 하에서 김대중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으니 7년 전의 범죄에 대해서도 철저히 수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문 : 1980년 7월4일 계엄사에서 발표한 김대중 사건의 수사 결과 발표문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는가요.

“물론입니다.”

문 : 김대중과 재야인사 등이 내란음모 등을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군부 세력을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을 불법적으로 체포, 감금하고, 고문, 가혹행위 등을 통해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김대중 씨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서는 그 후에도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저는 그 사건이 결코 조작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 국회 권한을 대행할 기구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구성하기로 계획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신헌법이 만들어지고 있을 무렵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법률가가 저에게 문제점으로 신헌법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새 국회가 개회될 때까지는 입법기능을 수행할 기구가 없으므로 위와 같은 기구를 헌법 부칙에서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채택한 것입니다.”

문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대통령령에 의하여 설치된 대통령의 자문기관에 불과하여 입법 권한이 없으므로, 그 명칭이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되었다 하여 입법 권한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 설치 근거는 헌법에 있으므로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부총리에게 요구한 1백억 원, 최규하 대통령 하야 압박

문 : 피의자들이 12·12 사건, 5·18 광주사태, 5.20 국회 봉쇄사건 등을 일으켜 헌법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킨 후 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혁명위원회 성격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국가보위입법회의의 활동은 내란 수행의 과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본인은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의자가 1980년 6월 20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이상연 보안사 정보처 보좌관, 윤석순 중앙정보부 총무부국장 등에게 창당 작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신당 창당에 대해서는 진술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시기는 6월이 아니라 8월 이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 : 김원기 전 부총리는 1980년 초여름 무렵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인 피의자로부터 잠깐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부총리 자리를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짐작하고 피의자를 찾아갔더니,

피의자가 돈 1백억 원을 달라고 하여, 최 대통령에게 보고한 다음 그 다음날 국무회의를 열어 예비비에서 1백억 원을 지원하도록 결의해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요.

“예, 그런 사실이 있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 그 돈도 신당 창당 작업에 사용된 것이 아닌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의자 등 신군부가 사실상 모든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등 실권을 잡은 상태에서 헌법 개정작업과 함께 신당 창당을 추진한 것은 결국 피의자가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저로서는 그 당시까지 그러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문 : 피의자는 피의자의 측근들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논의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 피의자는 최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압력을 가해 대통령을 고립시키는 한편 원로들을 동원하여 설득하는 등 양면작전을 구사하여 최 대통령으로 하여금 하야토록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사실과 다릅니다.”
[ 80년 8월 13일 최규하 대통령 노태우, 정호영 중장 등 장성진급자 계급장 수여장면. 출처 :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

문 : 피의자와 노태우, 정호용 등은 육사 11기 동기로서 동기생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여 온 민석원을 통하여 그와 매우 가깝게 지내는 김정렬 씨를 알게 되어 어른으로 모시게 되었나요.

“민석원이 저희와 같은 육사 11기 동기생이고 또 그가 김정렬 씨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제가 가깝게 지낸 사실은 없습니다.”

문 : 피의자 등은 1930년 동경 유학 시절부터 최규하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인 김정렬 씨에게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 김정렬 씨가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위해 처음 몇 차례 설득에 나섰을 때는 최규하 대통령이 “지금 국민들은 군인들이 나서는 것보다 나같이 별 의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 과도정권을 끌고 가기를 원하고 있다”며 하야를 거부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문 : 김정렬 씨가 1980년 7월 30일 청와대 접견실에서 오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장장 5시간 동안 최규하 대통령과 담판을 벌인 끝에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기로 결심했고, 김정렬 씨가 그날 자정 무렵 이촌동에 있는 자신의 장미맨션 아파트로 돌아와서 피의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내용을 통보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 최규하 대통령이 다음 날인 1980년 7월 1일 피의자를 청와대로 불러 하야 결심을 밝히고 내 자리를 대신 맡아달라고 했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들 입니다.”

문 : 최규하 대통령이 김정렬 씨의 수차례에 걸친 설득에도 불구하고 하야를 계속 거절하자, 김정렬 씨가 끝까지 하야를 거부한다면 신군부가 김재규 내란사건과 관련하여 최 대통령을 내란방조 혐의로 문제 삼으려 한다면서 은근히 협박조로 말했다는데 그 사실을 아는가요.

“그런 사실을 아는 바도 없고 들은 바도 없습니다. 또한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 김영삼에 대한 정계 은퇴 압박공작

문 :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고등학교 선배인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신 총리가 거절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문 :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결심 과정에 피의자 등 신군부가 폭행이나 협박 등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최규하 대통령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들입니다.”

문 : 시중의 소문에 의하면 최 대통령에게 하야의 대가로 1백억 원을 주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문 : 그러면 피의자는 본 검사에게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하게 된 솔직한 배경을 진술해 줄 수 있는가요.

“그것은 최규하 대통령이 답변할 성질입니다. 그러니 위 질문은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해주십시오.”

문 :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최 대통령의 하야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받고 있는 입장에 있으므로, 제가 아무리 진술해 봐야 변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 : 최규하 대통령의 성품이 어떻다는 말인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분의 성품은 매우 강직한 성품으로서 신중하고 추진력이 강하신 분입니다.”

문 : 김영삼 총재의 정계 은퇴를 추진하기로 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문 : 1980년 7월30일경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실에서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있는 가운데 이학봉 대공처장에게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경남고 선배이니 정계 은퇴를 선언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을 통해 1980년 8월15일까지 김영삼 총재가 정계은퇴를 하도록 하되, 은퇴 성명에는 “시국이 어려워진 책임이 3김 씨 등 정치인들에게 있다,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서 이 나라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두 가지 점을 포함하게 하고,

만일 정계 은퇴를 거부할 경우, 여자관계와 정치자금 문제 등 약점을 언론에 폭로, 파렴치한으로 몰아 도덕적으로 매장하겠다고 협박하라는 취지로 지시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과정

문 : 피의자는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함에 따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피의자를 국가원수로 추대키로 한 다음, 1980년 8월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9월 1일 취임했나요.

“제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사실이나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추대토록 조종한 일은 없고, 그 무렵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이 보안사령관실로 저를 찾아와 현 시국 수습을 위해서는 제가 대통령직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고 돌아간 사실이 있습니다.”

문 : 비상계엄의 확대, 정치인의 체포.연금, 정치활동의 금지,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헌법 개정 작업의 추진, 신당 창당 등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군부 최고 실력자로서

합동수사본부장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고 있던 피의자가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추진한 조치들로서, 새로운 정권 창출의 준비 또는 기초행위로서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집권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계엄령 하에서 제가 집권할 생각이 있었다면 바로 대통령직을 빼앗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런 의도가 없었던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문 : 피의자는 결국 12·12 사건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불과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 올랐으며 그 준비 과정이 상당히 치밀하고 외관상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던 점에 비추어 계획된 절차가 아니었나요.

“결과적으로 제가 대통령직에 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와 같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만, 대통령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최규하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으며,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 정권 잡을 생각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됐다

문 : 피의자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들이 12·12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한 후에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 비상계엄 전국 확대, 김대중, 김종필 등의 불법 체포.구금, 포고령 10호에 의한 정치활동 규제, 국회의 봉쇄.점거,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최 대통령의 강제 하야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내란을 한 다음, 피의자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정권을 탈취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사실과 다릅니다.”

문 : 피의자가 1980년 5월17일 24시를 기해 대학가의 시위가 중단되고 북한의 남침 동향이 없음에도 남침위기설을 조작하여 대통령의 재가없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강행하고, 이를 구실로 계엄군을 동원하여 대학과 국회를 점거.봉쇄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하는 등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항거하는 시위가 예상되는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을 투입하여 학생,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여 유혈사태를 야기하는 등 비상상황을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초헌법적 비상기구인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운영함으로써 대통령과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것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하여 내란하고, 그 과정에서 군을 정권 찬탈의 목적에 이용하여 군형법상의 반란을 하는 등의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 : 박정희 장군이 집권한 과정과 피의자가 집권한 과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박정희 장군은 분명히 혁명을 하여 정권을 잡았고, 저는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을 뿐입니다.”

문 : 더 할 말이나 유리한 증거가 있는가요.

“지금 국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특별법은 소급입법으로서 헌법에 위반된다고 생각합니다. 소급입법을 하여 처벌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우리 헌정사에 불행한 일이므로 신중을 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끝)



정소앙 발행인
키워드 : 5.17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 국보위 | 북한남침설 | 비상계엄
사설·칼럼 주요뉴스

오늘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