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특집 ] ⑥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 2회, “12·12 사건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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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 5.18 특집 ] ⑥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 2회, “12·12 사건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 합수부 수사 담당자 백동림, 정승화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전두환에게 보고
- 처음부터 병력 동원할 생각은 없었다는 전두환의 궤변
- 12.12 군사쿠데타 암호명, ‘생일집 잔치’
- 1979년 12월 1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를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
- 만약 12·12 사건 당시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 12.12 군사반란 세력에 맞섰던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생전 모습. 출처 MBC 방송 캡처 ]
[한국시사경제저널]

생전에 전두환은 5.18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 1995년 내란 혐의 재판 당시 )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2003년 2월 SBS 인터뷰)

“광주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나는 광주 학살에 대해서 모른다”( 2019년 당시 정의당 부대표가 5․18 책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

그렇게 평생 단 한 번, 5.18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던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9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때 조선일보는 ‘[사설] 현대사 아픔과 갈등, 굴곡, 논란 안고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을 남겼다.

- 지금 우리 사회는 좌우 진영과 지역, 계층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이 대립과 갈등이 격화된 출발점이 바로 전 전 대통령 집권 과정이었다. 이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격동의 현대사 중심에 서있던 전 전 대통령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전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떠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5·18 희생자 중 한 사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했다. 이제는 어두웠던 역사의 기억도 그와 함께 떠나보냈으면 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우리 사회도 대립과 갈등, 상처를 넘어서는 길로 가기를 바랄 뿐이다. -

그러나 5‧18유족회 등 5월 단체들은 “학살자의 편안한 죽음에 분노한다”는 뜻을 밝혔다. 아무리 미움 대신 용서를 택하려 해도, 그 전제가 되는 ‘진심 어린 사과’가 빠졌기 때문이다.

용서와 비난, 그 어느 쪽을 선택하건 판단에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두에 옮긴 단편적인 몇 마디가 아닌, 속마음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통해 전두환의 생각 회로를 파악하기로 한다.

1차 자료는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시작된, 5·18 수사 당시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다.

조사와 신문조서 작성이 3회 이루어졌기에, 본지( 한국시사경제저널 ) 역시 3회에 걸쳐 신문조서 원문 전체를 그대로 싣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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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신문조서( 제2회 ) 1995년 12월 7일 안양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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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수부 수사 담당자 백동림, 정승화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전두환에게 보고

문 : 10·26 사건 수사 결과 정승화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정승화 총장이 10·26 사건에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지요.

“그런 소문은 시중에서도 나돌고 있었지만, 군 내부에서도 상당히 많이 돌고 있었으며, 장교들 사이에 그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문 : 피의자는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장군 등과 접촉하여 정승화 총장에 대한 군내 여론을 탐문하면서 정 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협의한 결과, 그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바 있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의자는 1989년 12월31일 국회에서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노태우 등과 접촉하면서 정 총장의 연행·조사 문제, 군 개혁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사실이 있다”고 증언한 사실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문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답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요.

“당시에는 국회 증언 자료를 급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증언한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 : 피의자는 합수본부장은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포괄적인 수사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통령의 사전 결재 없이도 계엄사령관을 연행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아시나요.

“대통령 결재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는 법적 근거는 없지만, 저는 정 총장이 계엄사령관이기 때문에 예우 차원에서 재가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례들, 예컨대 강문봉, 윤필용 사건 등에서는 대통령에게 구두로 귀띔만 하고 체포한 것으로 압니다.”

[ 78년 11월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 삼우제에 참석한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출처 : 정부기록사진집 ]

문 : 그렇다면 재가를 거절하는 최규하 대통령을 설득하여 재가를 받기 위해 12월12일 밤에 노력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 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문 : 10·26 사건의 합수부 수사 주무였던 백동림은 10·26 사건 수사 결과, 정승화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보고서를 피의자에게 제출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 백동림의 진술에 의하면, 피의자 역시 백동림의 위 보고에 수긍하였다는데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문 :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을 연행 조사하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였나요.

“1979년 12월 초경으로 기억합니다.”

문 :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피의자 혼자서 결정했나요.

“정 총장에게 혐의가 있다는 수사관들의 건의를 여러 차례 받고, 최종적으로 저 혼자 결정했습니다.”


■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일이 커진 것이고, 처음부터 병력을 동원할 생각은 없었다는 전두환

문 : 정 총장을 연행할 경우, 정 총장의 추종 세력이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나요.

“저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범죄 혐의를 받고있는 정 총장을 연행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추종 세력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양심에 비추어 그 정도는 용인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일이 그렇게까지 크게 번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문 : 만약 정 총장을 연행하여 조사를 했는데, 혐의가 없어서 그냥 돌려보내면 피의자는 괘씸죄에 걸려 어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텐데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혹시 실패할 경우 대형 군사 충돌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나요.

“일이 최악으로 진행되면 대형 충돌 사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큰 저항 없이 연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상태도 엉성했던 것입니다.”

문 : 정 총장 추종 세력이 병력을 동원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계획이었나요.

“결과적으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성을 잃고 완강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일이 커졌던 것이고, 처음부터 이쪽에서 병력을 동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문 : 피의자는 1979년 12월 초순경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 대공2과장 겸 합수부 수사 제1국장에게 정 총장 연행, 조사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 수립을 지시했나요.

“이학봉인지, 허삼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지시하여 계획을 수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 : 정승화 총장 연행, 조사 계획인 소위 12·12 거사 계획은 정 총장을 실제 연행하는 계획, 연행에 찬동하는 장성들을 30경비단장실에 집결시켜 지원하게 하는 계획 연희동 요정으로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 실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정 총장 추종 수도권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병력 동원을 차단하는 계획, 수경사 30, 33경비단 및 헌병단 병력을 활용하고 필요하면 지원 병력을 동원하는 계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 : 허삼수 대령 등은 허삼수, 우경윤 대령이 직접 정 총장을 만나 연행하기로 하고 보안사 수사관 7명을 동원하여 3명은 부관실에서 수행부관, 경호장교를 제압하고, 2명은 성환옥 대령, 이종민 중령과 함께 총장공관 입구 초소 경비병을 제압하고,

나머지 2명은 총장공관 현관 주변에서 외부상황에 대처하는 한편, 최석입 중령은 수경사 33헌병대 1개 중대병력 60여명을 동원하여 공관촌 입구 해병대 초소를 제압, 퇴로를 확보하고 총장공관과 해병대 경비막사를 제압하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모든 것을 지시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 12.12 군사쿠데타 암호명, ‘생일집 잔치’

문 : 현직 계엄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혐의자로 연행 조사한다면 당연히 계엄사령관의 해임 조치가 수반될텐데, 후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등 인사 문제도 보고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는가요.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기 위한 보고서에는 인사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후임 참모총장 등 인사 문제는 이튿날 아침 일찍 노재현 국방장관이 대통령과 상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문 : 현직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내란사건 관련 혐의자로 연행 수사하는 것은 계엄업무에 영향을 주는 중요사항일 뿐 아니라 육군 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의 인사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국방장관 소관 사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앞에서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수사 대상자가 지극히 중요한 인물일 때에는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을 뵙고 직접 구두로 보고드리고 처리한 전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날은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았으며, 전에 이미 2~3차례 노 장관에게는 구두로 보고한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 : 1979년 12월 12일 18시 30분경 수경사 30경비단장실로 유학성 등 장군 9명과 장세동, 김진영 대령을 집결토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혹시 일이 잘못되어 피아간에 군사 충돌이 발생하면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불러 모은 것이 아닌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커진 것은 장태완 때문이며, 처음부터 병력 동원까지 예상한 것은 아닙니다.”

문 : 피의자 측에서 제출한 자료에는 12·12 저녁 30경비단에 집결한 황영시 1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등은 직속 상관인 이건영 3군사령관의 외출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하나, 이건영 3군사령관은 황영시 등이 부대를 이탈한 사실에 대해 사전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녹음한 테이프에 의해서도 이건영 3군사령관은 황영시 등의 부대이탈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한 것이 인정되는데, 당시 피의자 황영시 등을 30경비단에 집결시킬 때 극비리에 집결하도록 요청한 것이 아닌가요.

“부대 이탈 승낙 여부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으나 극비리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문 : 그날 경복궁 모임의 암호명이 '생일집 잔치'였다는데요.

“저는 모릅니다.”

문 : 1.3.5 공수여단장, 9사단장 등 12·12 사태 시 실제 병력이 동원된 부대 지휘관들이 30경비단장실에 모두 집결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경우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를 동원할 사전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병력동원을 하려고 사전에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 12.12 당일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 연희동 음식점으로 사전 유인

문 : 정 총장을 연행할 경우 정 총장이나 그 측근 군 지휘관 등이 이를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군을 동원하여 합수부 등을 공격해 올 것도 예상되므로 필요하면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솔직히 말씀드려 합수본부장인 제가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정 총장을 연행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복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대편의 대응이 그렇게 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 :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을 1979년 12월12일 18시30분 연희동 음식점으로 초대한 사실이 있지요.

“예.”

문 : 연희동 만찬은 1979년 12월10일경 피의자가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에게 장군 진급 예정자로 선정되었음을 미리 알려주며 조홍의 진급 축하 및 계엄업무로 고생하는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헌병감을 위로하는 만찬을 주선하도록 지시하여 이루어졌다고 조홍이 진술하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것이 아니라 조홍이 훨씬 전부터 자기가 준장으로 진급했으니 몇몇 선배 사령관들을 모시고 한턱 내겠다고 하여 모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 : 조홍의 진술과는 다른데요.

“제가 초청한 자리가 아니라 조홍이 한 턱 낸다고 해서 마련된 자리입니다.”

문 : 그 당시 장군 진급 심사는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12월 6일부터 12월 12일까지 진행되어 12월 12일 16시경 진급 심사위원장인 차규헌이 참모총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는데, 어떻게 그 며칠 전에 조홍이 장군 진급 예정자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인가요.

“제가 진급 예정사실을 먼저 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안사령관으로 있으면 사전에 그런 것을 알게 되는데, 제가 조홍에게 진급 예정 사실을 알려준 것 같습니다.”

문 : 피의자가 12월 12일 보안사령부를 출발하여 대통령으로부터 정 총장 연행 보고 문서에 재가를 받기 위해 총리공관에 도착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보안사에서 총리공관으로 막바로 간 것이 아니라, 30경비단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장군들을 만나고 난 다음 총리공관으로 간 것 같은데, 출발 시간이나 도착 시간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 : 총리공관으로 갈 때, 이학봉 중령을 대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가 수사 책임자였기 때문에, 제가 대통령 질문에 답변이 막히면 대신 답변하게 하려고 함께 간 것입니다.”

문 : 보안사령관인 피의자와 수행원의 복장은 어떠했으며, 각자 권총 등 무기를 휴대했는가요.

“전투복 차림이었던 것 같고, 권총은 당연히 휴대하지 않았습니다.”

문 : 당시 총리공관의 경비 상태는 어떠했는가요. 그 때 이미 청와대 경호실 병력이 그곳에 와서 경비를 맡고 있었는가요.

“총리공관의 경비 상태는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문 : 최 대통령에게 무엇이라고 보고했나요.

“박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정 총장에게 혐의가 있어 연행조사를 해야겠다고 보고했습니다.”

문 : 그때 최 대통령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국방장관의 서명을 받아야 하니 국방장관과 같이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 1995년 12월 6일,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 보좌관이던 김광해 씨가 기자들과 만나 전두환이 최규하 전 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증언하는 장면. 출처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아카이브 ]

■ 1979년 12월 1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를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

문 : 대통령께서는 연행을 승인하는 태도이던가요, 승인하지 않는 태도이던가요.

“저는 대통령께서 정 총장 연행 사실은 묵시적으로 승인을 하시되, 절차상 국방장관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문 : 피의자가 대통령이 승인하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만약 대통령께서 승인하시지 않겠다면 그 자리에서 명시적으로 정 총장 연행은 불가하다고 말씀하셨을 텐데, 그런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 : 그렇다면 대통령이 왜 그 문서에 재가를 하지 않았나요.

“절차상 주무장관인 국방장관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 : 피의자 등이 재가를 하도록 최 대통령을 위협하거나 강요한 사실은 없었는가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강요한 사실이 없습니다. 최 대통령께서는 항상 침착하고 중후하신 분으로 저는 그 분을 대통령으로 모시는 동안 한 번도 결례를 한 사실이 없습니다.”

[ 1980년 7월,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는 최규하 대통령. 출처 : 정부기록사진집 ]

문 : 세간에서는 최 대통령이 유약하고 무능했으며, 피의자가 상당히 무례했던 것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최 대통령은 매우 훌륭하신 분으로 그런 사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문 : 일부에서는 피의자가 최 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재가를 강요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문 : 최 대통령이 1980년 8월 16일 왜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고 생각하나요.

“저로서는 답변할 수 없으며, 답변할 성질의 질문도 아닙니다.”

문 : 검찰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79년 12월 12일 21시경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 등 육본 수뇌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이 대응조치 움직임을 보이자, 합수본부장인 피의자 등이 필요한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장악하기로 하고,

박희도 1공수여단장에게 그 준비를 지시하여 같은 날 21시 10분경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이기룡 부여단장에게 국방부와 육본으로 출동준비를 하는 한편 병력 진입 시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하고, 21시 20분경 이기룡 대령이 1공수여단 각 대대에 병력집결 명령을 하달하여

21시 45분경 1공수여단 1대대 병력이 출동을 전제로 부대 앞 신월동 삼거리에 집결하고, 이기룡 부여단장은 22시경 용산 삼각지까지 진출하여 국방부, 육본 관계자와 접촉을 시도한 사실이 있는데요.

“검찰에서 이미 제출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참고하여 어느 쪽이 먼저 공격했는지에 대해 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 : 그 무렵 위와 같은 1공수여단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육본 수뇌부가 1공수여단 병력이 육본으로 출동하는 것으로 보고 정식 작전명령으로 수도권 공수여단 중 유일하게 합수부 측에 가담하지 않은 9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육본을 방어하기로 한 사실이 인정될 뿐 보안사나 30경비단을 공격하기 위해 먼저 병력출동을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9공수여단 병력이 실제 12월 13일 5시경 출동한 것은 사실이나 합수부측에서 9공수여단 병력이 출동하기도 전인 12월 12일 21시 20분경 1공수여단에 출동준비를 지시하거나 같은 날 22시경 특전사령관 체포준비를 지시하고 24시경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사실에 비추어, 피의자측이 먼저 병력을 동원한 것이 아닌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사실은 검찰에서 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 : 군 통수계통인 대통령과 국방장관으로부터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아무런 지시나 재가가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육군 정식 지휘계통의 지휘관들이 정승화 총장 연행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반란으로 보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 출동 준비를 하는 등 대응 조치를 취한 것을 두고, 정승화 총장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나아가 반란 또는 내란한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정승화 총장 연행이라는 정당한 공무집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정식 지휘계통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등 합수부의 공무집행에 저항하려 했기 때문에 병력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문 : 1979년 12월 1일경 최 대통령 권한대행을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 조사결과는 어떠했는가요.

“제가 육본의 전창렬 중령을 인솔하고 가서 전 중령이 조사한 사실은 기억나고, 최 대통령이 김재규를 범인인 줄 알고도 잡지 않았다는 혐의를 조사한 것으로 압니다. 결국 최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해소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 이는 정 총장 연행 조사에 대해 최 대통령이 재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전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미리 조사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문 : 1980년 8월 16일에 이루어진 최 대통령의 급작스런 하야는 피의자 등이 조사한 위 조사 내용을 가지고 최 대통령을 협박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 만약 12·12 사건 당시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문 : 1980년 1월8일 최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12·12 사건은 정당한 업무집행이었다고 밝혔다고 하는데, 그 경위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그 당시 최 대통령이 12·12 사건을 정당한 업무집행이었다고 밝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위는 알지 못합니다.”

문 : 최 대통령이 12월 13일 새벽 사후 재가를 한 것은 사실이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여 이미 범죄가 성립된 이상 사전에 필요했던 재가를 사후에 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성립된 불법은 여전히 그대로 남고,

다만 재가권자가 기왕에 행해진 처분이나 행위를 사실상 용인하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며, 최 대통령이 이미 발생한 상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사태를 수습하는 의미에서 정 총장 연행을 재가했지만, 이미 형성된 형사상 또는 행정상의 위법이 소급하여 치유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12.12 군사반란 직후 보안사에 모여 함께 사진 촬영한 반란의 주역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

문 : 12·12 사건의 준비과정을 살펴보면, 합수부의 10·26 사건 수사와는 직무상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방부 군수차관보, 일선 군단장과 사단장, 특전사 여단장 등 수도권지역 주요부대 지휘관들과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 문제를 협의하고, 이들을 사전에 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하도록 하는 한편,

같은 시각에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육본 헌병감 등 육본 직할부대장들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는 등 사전 조치를 했고, 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한 장성들은 12·12 사건 당시 지휘부를 형성하여 집단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요구하고,

병력동원, 육군 정식 지휘계통의 핵심 지휘관 체포, 국방부, 육본, 중앙청 점령 등의 조치를 협의 결정했으며, 나아가 그들이 실제로 병력을 동원하여 군의 정식 지휘계통을 와해시킨 점 등으로 보아, 필요한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총장의 제거를 관철하고, 결국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군 지휘권을 찬탈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문 : 앞서 나온 바와 같이 그 직후인 1979년 12월 13일자로 이희성, 노태우, 정호용 등이 군의 주요한 보직을 모두 차지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나요.

“군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다면 제가 참모총장에 올랐어야 할 텐데, 저와 친하지 않은 이희성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한 것만 보아도 저희들이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은 억울합니다.”

문 : 12·12 주도세력은 당시 정권을 장악할 의도를 갖고 있었고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 5·18 사태 등을 통해 실제 집권하고 대통령직에까지 올랐으므로 내란에 해당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요.

“그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 더 할 말이 있는가요.

“만약 제가 12·12 사건 당시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계속)







정소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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